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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리는 대부분 지형이 평지인데, 선동역이 위치하려 했던 곳은 지형적으로 해발고도 10~20m 내외의 낮은 구릉지였어요. 그 고도에 건설하려고 했어요.
□ 역의 이름이 왜 선동역으로 붙여졌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철도 노반이 ‘선동(용수말)’이라는 마을을 지나가면서 그곳에 기차가 교행하는 선로, 화물 처리 플랫폼, 기차 역사(驛舍) 등이 들어설 역을 건설하려고 했기 때문으로 생각돼요.
보통 기차 역명은 역이 위치하는 지역의 지명을 빌려 작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역이 ‘선동’이라는 마을에 위치하기 때문에 ‘선동역’이라고 붙여진 것으로 보여요. {임ㅇㅇ(남성, 1944년생)}
□ 로깡이 선동에 100여 개 이상 있는 곳의 상황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로깡이 있는 곳은 ‘선동’이라는 마을이에요. 행정명으로 선도2리에 속하고 자연마을의 이름은 ‘용수말’이라고 해요. 선동역은 로깡이 있는 곳을 포함하여 450m 정도 정거장 유효거리가 돼요. 따라서 선동역은 로깡이 있는 곳은 틀림없이 포함된다고 볼 수 있어요. 제1공구장인 이ㅇㅇ의 동생이 시공사 삼부토건 사무장이었는데 그가 언덕 너머에 역이 있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또한 우리 밭이 선동역사 예정 부지 안에 있었어요. 지금도 로깡 주변의 토지는 지목이 철도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임ㅇㅇ(남성, 1944년생)}, {정ㅇㅇ(남성, 1948년생)}
□ 역이 건설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1960년대 당시 지금처럼 어떤 시설물이 지역이 들어올 때 찬반을 따지는 시대는 아니었어요. 비인공업지구 건설이 취소되면서 그에 따라서 비인선 건설이 중단되었고 자연히 선동역도 건설이 무산된 것이지요.
우리는 비인공업지구 건설이 취소된 이유 중의 하나로 당시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비인에서 울산으로 공단 조성 계획이 변경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임ㅇㅇ(남성, 1944년생)}
□ 선동에 역이 건설된다는 정보는 누구에게 들으셨는지요?
삼부토건 제2공구장 이ㅇㅇ의 동생이 당시에 시공사 삼부토건 사무장이었는데, 그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또한 하동 영감이라는 분이 스데바[사토장]에서 노반 평탄화 작업을 함께 하면서 선동마을을 가리키며 “이쪽이 역이래”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선동에 역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임ㅇㅇ(남성, 1944년생)}
□ 선동역이 건설되면서 선도리 땅값에 영향을 주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 니까?
당시 공단 건설 등 개발 지역에 땅값이 오르지 못하도록 지역 고시를 하였어요. 그리고 선도리 구간은 공장이 들어서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영향은 받지 않았어요. {임ㅇㅇ(남성, 1944년생)}
□ 지금까지 로깡을 철거하지 못한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현재 로깡 100여 개 이상이 설치되어 있는 곳은 배수로가 지나는 철도 노반으로 로깡 전체의 1/2이 안 되는 로깡은 흙으로 덮여 있고, 1/2이 조금 넘은 로깡은 노출되어 있어요.
비인공단 취소로 제2공구 구간도 철도 노반공사가 중단되면서 로깡이 있는 선동역사(驛舍) 부근도 로깡을 설치하고 매립하는 과정에서 일부만 매립하고 공사를 중단했어요. 그래서 당시 매립한 부분은 로깡이 흙에 묻혀 있고, 매립하지 못한 부분은 로깡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지요. 로깡을 설치하고 58년이 지나다 보니 흙으로 덮은 로깡도 일부 부분이 보이는 곳도 있어요. 지금도 로깡이 있는 일대는 철도 부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로깡이 철거되지 않은 것은 지금도 우천 시 로깡이 배수로의 역할을 하고 있고, 일부 철도부지로 남아 있으며, 철거 비용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정ㅇㅇ(남성, 1948년생)}
□ 선동역 외에 선도리 부근에 로깡이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로깡은 선동역이 들어설 장소 외에도 용지터널에서 나와 용지에서 선동으로 가는 철도 노반이 지나는 곳은 논이기 때문에 배수로가 설치되어야 했어요. 기억으로 적어도 4곳 이상 배수로에 로깡이 있었어요. 이 구간은 나중에 경지정리가 이루어질 때 도로와 나란하게 배수로가 설치되면서 로깡이 철도 노반 속에 묻혀서 이제 겉으로 보이지 않아요. {박ㅇㅇ(남성, 1941년생)}
□ 현 위치에 있는 로깡의 상태는 어떠한지요?
배수로 용도로 사용한 로깡은 건설된 지 약 57년 정도 지났어요. 그런데도 현재 배수로 기능을 하고 있어요. 배수로 로깡은 전혀 훼손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유는 철거하지 않아도 농사짓는 데 크게 방해 되지 않고, 여전히 예전이나 지금이나 배수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100여 개 이상이 되는 로깡의 철거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도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봐요.
※ 조사자의 의견
비인공업지구조성사업과 비인선철도기공식은 1966년 4월 29일 오후 2 시 30분 서면 도둔리 서도국민학교 교정에서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 전예 용 건설부 장관과 지방 유지 및 주민 다수가 모여 거행되었다.
서천역에서 비인공업지구가 건설될 예정이었던 서면 마량리 비인역까지 노선 거리는 22km이었다. 역 구간별로 보면 서천역에서 종천역까지 7.7km, 종천역에서 선동역까지 7.1km, 선동역에서 비인역까지 7.2km였다.
비인선이 지나는 노선은 현재 행정구역으로 서천읍 군사리(구 서천역)->서 천읍 신송리->종천면 장구리->종천면 당정리->종천면 종천리(종천역)->비 인면 다사리->비인면 장포리->비인면 선도리(선동역)->비인면 칠지리(추 정)->서면 월호리(추정)->서면 신합리(추정)->서면 도둔리(비인역)였다.
비인선은 비인공업지구의 화물 수송을 목적으로 부설하려던 철도였다. 주 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비인선은 1966년 4월 29일 착공하였으나, 울산 공 단에 밀려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1969년 공단 건설이 취소되면서 그 무 렵에 최종 무산되었다. 라고 알고 있다.
1969년 철도연감에 의하면, “비인선은 서천~비인 간 22km로 비인 임해공 업단지의 건설에 따라 장항선 서천역에서 분기하여 비인에 이르는 22km 의 산업철도로 1966년 4월 29일 착공하여 1968년 말 현재 전 공정의 11.5%가 진척되었으며, 지속 사업으로 1973년도에 완공 계획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비인선과 관련된 역은 서천역(舒川驛), 종천역(鍾川驛), 선동역(船東驛), 비 인역(庇仁驛)의 4개이고, 3개의 역이 건설될 예정이었다. 역 부지의 위치는 서천역은 구 서천역이 있던 위치이고, 종천역은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토 대로 서천역에서 7.7km 거리에 있는 현재 구도로와 신도로가 갈라지는 지 점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동역은 종천역에서 7.1km 거리에 있는 선도리 선동마을로 추정되며, 비인역은 선동역에서 7.2km 거리에 있는 비인공업지구가 들어설 서면 도둔리로 추정된다.
비인선 철도의 궤간은 1,435mm인 표준궤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철도 공사는 철도건설국에서 지명경쟁입찰로 비인선 1공구(서천~종천)는 삼양공무, 2공구(종천~비인)는 삼부토건에서 맡아 공사를 하였다.
비인선 구간의 철도 노반 흔적은 현재 하부 노반, 배수관, 교각, 터널 등으로 남아 있다.
비인선 선도리 구간 철도의 터널을 기억하는 주민 4인(1940~60년대생)을 대상으로 면담한 내용을 글로 정리하였다.
□ 비인면 선도리의 자연마을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비인면 선도리의 자연마을은 솔머리[송두, 배들이, 선서], 용수말[선동], 왕마지[용지]로 구성되어 있어요.
□ 비인면 선도리에 용지터널이 건설되기 전 도로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1966년 터널 공사가 있기 전에 장포리와 선도리 사이의 통행은 산길로 다녔어요. 터널이 뚫린 후에는 이곳을 통해 두 지역으로 다닐 수 있었어요.
□ 비인면 선도리와 장포리 사이에 있는 터널의 이름과 그렇게 붙여진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선도리와 장포리 사이에 있는 터널의 이름은 ‘용지터널’이라고 부르지요. 터널의 중간쯤에서 선도리와 장포리의 행정 경계가 지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터널이 두 지역에 걸쳐 통과하지만, 터널 부근에 장포리보다는 선도리 ‘용지[왕마지]’라는 마을이 가까이에 인접해 있고 또한 공사와 관련된 사람들이 숙식을 주로 ‘용지’라는 마을에서 하였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어요. 오늘날 지역 간에 건설 공사로 다리 등을 놓으면 이름을 공모해서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용지터널’은 공모한 이름이 아니라 관계 기관이나 공사 관계자들이 협의하여 지역 명칭의 고유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근의 마을 이름을 붙인 것 같아요. {임ㅇㅇ(남성, 1944년생)}
□ 터널의 길이, 위치, 소유 및 내부 시설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용지터널’은 길이가 130m이고, 비인면 선도리와 장포리를 지나고 있어요. 터널은 완공 당시 철도청 소속이었다가 유ㅇㅇ이 매입하여 소유하였고, 다음으로 신ㅇㅇ에게 넘어갔다가 현재는 ㅇㅇ펜션 주인의 소유로 되어 있을 거예요. 내부 시설로는 터널 바닥 중앙에 배수로가 나 있고, 그곳이 들여다보이도록 덮개를 덮고 있어요. 또한 기차가 들어오는 경우 사람이 터널에 들어가 있을 때 피신할 수 있도록 피난처가 벽에 파여 있어요. {신ㅇㅇ( 남성, 1956년생)}
□ 터널이 완공된 후 어떻게 활용되었나요?
터널 완공 후, 비인공업지구 조성 취소로 기차는 통행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우회도로가 건설되기 전까지 사람, 우마차, 자동차, 트럭 등이 다녔어요. 특히 군용 트럭이 많이 다닌 기억이 나요. 나중에 우회 도로가 건설된 후 사용 빈도가 줄어들면서 터널은 방치되었어요. 터널이 주요 도로로 사용되지 못한 이유로 터널 안쪽은 기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단선 노폭으로 좁아서 트럭 두 대가 교행하기 어려워 그 대안으로 우회도로가 건설된 것이지요.
처음 우회도로는 바다 가까이로 지나는 해안도로를 건설하려고 하였지만, 예정 노선에서 일부 지주의 반대로 도로 건설이 무산되었어요. 결국 기존 철도 노반 구간을 활용하는 방안이 검토되었고, 터널 옆을 통과하는 도로가 건설된 것이지요.
터널이 방치되고 있는 상황에서 활용 방안으로 젓갈 저장이나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실행되지는 못했어요. 한때 터널 활용으로 지역의 고구마와 생강을 매입하여 터널에 저장하였지만, 습기가 많아 포기했다고 들었어요. 내 기억으로 2021년에 썩은 고구마가 터널 밖에 버려진 것을 본 적이 있어요. 2023년 현재는 터널을 사용하지 않고 있어요.
지금이라도 마을에서 적절한 용도로 활용하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젊은 사람들이 타지에 나가 살고 있고, 농촌에는 노인들만 남게 되어 논의 대상이 되지 못해 안타까워요. {임ㅇㅇ(남성, 1944년생)}
□ 터널과 관련하여 남아 있는 기억은 무엇이 있나요?
터널과 관련하여 잊지 못한 기억이나 추억은 많지 않지만, 터널 건설 당시 비인공업지구 건설로 인한 지역 발전에 큰 기대를 했었어요. 터널을 볼 때마다 비인공업지구가 들어왔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공사할 때 ‘용지터널’은 비인공업지구에 들어갈 화물을 나르는 철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당시 터널 건설의 찬반을 물어주었다면, 발전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당연히 찬성했을 거예요. 공단이 지역에 건설되면 지역민들은 혜택이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지역민들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다른 기억도 있어요. 어릴 때 철도 공사 중 임시로 뚫어 놓은 작은 구멍을 친구들이 기어서 통과하는 위험한 장난을 하면서 굴에서 놀은 기억도 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위험했던 장난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부들이 작업을 마치고 귀가하면, 친구들이랑 터널에서 나오는 흙을 실어 나르는 구루마[수레]를 몰래 타고 놀았던 기억이 있어요. 또 터널 안에 100m 거리가 되는 곳에 금[선]을 긋고 달리기 시합을 했던 기억이 있어요. {신ㅇㅇ( 남성, 1956년생), 김ㅇㅇ(남성, 1960년생)}
□ 터널이 건설된 이유와 터널 및 노반공사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1966년부터 비인공업지구가 서면 도둔리에 건설될 계획이었어요. 1966년 4월 29일에 비인공업지구조성사업과 비인선철도기공식이 서면 서도국민학교에서 개최되었어요. 지역 주민들은 철도 기공식이 실제로 열렸고, 당연히 터널이 건설되면 화물을 실은 기차가 다닌다고 생각했어요.
터널 공사 중 선도리와 장포리에서 철도 노반공사가 동시에 이루어졌어요. 이유는 터널을 뚫으면서 나오는 석비레[마사토] 흙을 철도 노반 둑을 쌓아야 했기 때문이에요. 굴에서 발생한 석비레는 인부들이 구루마[수레]에 실어서 운반하여 철도 노반이 조금씩 진척되었지요. 하루 작업량은 정해져 있었어요.
현재 선도리 쪽 도로의 높이는 과거 철도 노반 건설 때보다 약 1.5m 정도 낮아진 상태이고, 철도 노반을 낮출 때 나온 흙으로 바다 가까이 해안 길을 건설할 때 사용했어요. {신ㅇㅇ( 남성, 1956년생)}
□ 터널을 만들 때 공사 현장에 참여하여 일한 경험과 당시 상황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터널 공사는 1966년에 시작하여 5~6년 정도 걸렸어요. 나는 22살 때 공사 일에 참여했어요. 제2공구 구간 시공사는 삼부토건이었어요. 터널 공사는 중단 없이 한 번에 완공하였어요. 터널 안에 철도의 선로가 깔리지 않았을 뿐이지 터널은 정상적으로 완성되었어요. 터널 작업은 터널 안 양쪽에 지지대를 세우고 천정에 있는 흙이나 돌을 제거할 때는 답구다(판 모양으로 생긴 밀어서 넣고 뺄 수 있는 장치)를 앞으로 당겨 레일 위에 있는 구루마[수레]에 흙이나 돌이 채워지면 그것을 터널 밖으로 배출했어요.
터널은 비인면 선도리와 장포리 양쪽에서 각각 산을 뚫은 작업을 했어요.
터널은 뚫을 때 3점을 찍고 그 점들을 이어 앞에 새로 생기는 점을 다부라고 하는데 이런 방법으로 반복해서 다부를 찍어가면서 양쪽에서 굴을 뜷고 들어가면 결국 터널은 마주치게 되지요. 노미[끌, 정]라는 연장으로 굴을 뚫은 부위에 대고 망치로 두들겨 가로와 세로로 1m 정도 파낸 후 폭약을 막장에 설치하고 심지에 불을 붙여 발파해서 굴을 뚫고 들어갔어요.
굴 뜨는 노미[끌, 정]를 만드는 대장간을 “세오야끼”라고 불렀어요. 이런 방식으로 터널을 뚫고 들어갔지요. 터널 공사는 먼저 터널 벽에 콘크리트를 치고, 다음으로 아치형인 천정에 콘크리트를 치는 것을 ‘가시오’라고 말해요.
천정에 판자를 깐 다음에 자갈과 모래를 시멘트에 섞어 삽으로 비벼 만든 콘크리트를 타설하여 만들었어요. 당시 공사 현장에서 콘크리트를 타설한다는 말을 “공구리 친다”라고 했어요.
천정의 두께는 60전[60cm] 정도 될 거예요. 콘크리트 작업은 남자와 여자가 분담하여 일했는데, 여자들은 모래와 자갈을 머리에 이어 날라주었고, 남자들은 그것을 삽으로 비벼 콘크리트를 만들었어요.
당일 일을 하면 하루 단위로 노임을 전표로 끊어 주었어요. 전표에는 몇 공구인지 표시와 금액 등이 적혀 있었고, 인부들은 돈이 급하게 필요할 때 전표를 돈 대신 사용했어요. 거의 한 번에 간조(임금 정산)를 했던 기억이 나요.
당시 터널 공사는 제1, 2공구 구간으로 나누었는데, 터널을 중심으로 선도리 구간과 장포리 구간은 모두 제2공구 구간에 속했어요. 제1공구는 서천역에서 종천 부근 9km까지이고, 제2공구 구간은 종천 9km부터 서면 도둔 22km까지였어요.
터널 공사는 선도리와 장포리 양쪽에서 했어요. 나는 선도리 쪽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반대쪽인 장포리 공사 상황은 알 수 없었어요. 선도리 쪽에서 일한 인부는 약 60~70명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터널 공사에 일하러 온 사람은 거의 서천 관내 사람이고, 선도리에서 온 사람은 10여 명으로 알고 있어요. 전라도 광주, 경남 하동에서 온 사람도 있었어요. 아마도 타 지역 인부는 소장과 함께 다니던 사람으로 알고 있어요.
공사 감독은 공구마다 1명의 공구장이 전체를 감독하고, 그 아래에 십장이 공사 현장을 감독하고, 사무장이 행정 업무를 처리했어요. {임ㅇㅇ(남성, 1944년생)}
□ 터널이 건설되면서 선도리 주변 땅의 지가 변동이 있었나요?
당시 터널 공사가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땅 투기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하지만 비인공업지구가 들어설 서면에는 땅 투기의 붐이 있어서 서울 등 외지인들이 땅을 많이 매입하였다고 들었어요.{임ㅇㅇ(남성, 1944년생)}
※ 조사자의 의견
비인공업지구조성사업과 비인선철도기공식은 1966년 4월 29일 오후 2 시 30분 서면 도둔리 서도국민학교 교정에서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 전예 용 건설부 장관과 지방 유지 및 주민 다수가 모여 거행되었다.
서천역에서 비인공업지구가 건설될 예정이었던 서면 마량리 비인역까지 노선 거리는 22km이었다. 역 구간별로 보면 서천역에서 종천역까지 7.7km, 종천역에서 선동역까지 7.1km, 선동역에서 비인역까지 7.2km였다.
비인선이 지나는 노선은 현재 행정구역으로 서천읍 군사리(구 서천역)->서 천읍 신송리->종천면 장구리->종천면 당정리->종천면 종천리(종천역)->비 인면 다사리->비인면 장포리->비인면 선도리(선동역)->비인면 칠지리(추 정)->서면 월호리(추정)->서면 신합리(추정)->서면 도둔리(비인역)였다.
비인선은 비인공업지구의 화물 수송을 목적으로 부설하려던 철도였다. 주 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비인선은 1966년 4월 29일 착공하였으나, 울산 공 단에 밀려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1969년 공단 건설이 취소되면서 그 무 렵에 최종 무산되었다. 라고 알고 있다.
1969년 철도연감에 의하면, “비인선은 서천~비인 간 22km로 비인 임해공 업단지의 건설에 따라 장항선 서천역에서 분기하여 비인에 이르는 22km 의 산업철도로 1966년 4월 29일 착공하여 1968년 말 현재 전 공정의 11.5%가 진척되었으며, 지속 사업으로 1973년도에 완공 계획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비인선과 관련된 역은 서천역(舒川驛), 종천역(鍾川驛), 선동역(船東驛), 비 인역(庇仁驛)의 4개이고, 3개의 역이 건설될 예정이었다. 역 부지의 위치는 서천역은 구 서천역이 있던 위치이고, 종천역은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토 대로 서천역에서 7.7km 거리에 있는 현재 구도로와 신도로가 갈라지는 지 점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동역은 종천역에서 7.1km 거리에 있는 선도리 선동마을로 추정되며, 비인역은 선동역에서 7.2km 거리에 있는 비인공업 지구가 들어설 서면 도둔리로 추정된다.
비인선 철도의 궤간은 1,435mm인 표준궤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철도 공사는 철도건설국에서 지명경쟁입찰로 비인선 1공구(서천~종천)는 삼양공무, 2공구(종천~비인)는 삼부토건에서 맡아 공사를 하였다.
비인선 구간의 철도 노반 흔적은 현재 하부 노반, 배수관, 교각, 터널 등으 로 남아 있다.
비인면 성내리와 관리 간 골독재를 기억하는 주민 4인(1930~60년대생)을 대상으로 면담한 내용을 글로 정리하였다.
□ 골독재를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골독재는 비인면 성내리와 관리 사이에 있는 재를 지칭하는 이름이에요. 두 지역에서 양쪽을 오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해요. 나는 성산에 살았지만, 친구들과 같이 학교 끝나면 골독재에 가서 골독[곱돌]을 주었던 기억이 나요. {신ㅇㅇ(남성, 1960년생)}
※ 조사자의 의견
이 재에 실제로 골독[곱돌]이 많이 있다. 재는 길이 나 있는 고개를 말하 는데, ‘골독재’라는 지명은 ‘골독’이라는 말과 ‘재’라는 말이 결합한 것이다.
‘골독’은 ‘곱돌’이라고도 하지만, 이곳 재는 곱돌재라고 하지 않고 ‘골독재’ 라고 부르고 있다. 조사자도 ‘골독재’를 어릴 때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지명이다.
□ 골독재에 가 본 적이 있으신가요?
국민학교 때에 친구들과 함께 골독을 줍기 위해 가 본 적이 있어요. 옛날 도로는 골독재 마루를 기준으로 성내리로 내려가는 구간과 관리로 내려가 는 구간 두 곳에 곡선 도로가 있었어요. 당시 골독재는 지금과 다른 도로 형태를 하고 있었지요. 지금도 골독재 일부 구간에 약간 곡선 도로가 있긴 하지만, 과거와 달리 곡선 구간을 직선형 도로로 바꾸었어요. 곡선 구간 도로 직선화 작업은 1975년 무렵에 이루어진 것으로 기억나요.
옛 도로는 비인면 성내4리 교촌을 지나 현재 도로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한 채의 슬라브 민가가 있는데 그 민가 뒤쪽을 지나 시계방향으로 진행하여 산에 있는 곡선 도로를 돌아 약간의 경사진 도로를 오르면 골독재 마 루에서 현재 도로와 합쳐져요. 과거에는 도로에서 나온 돌을 모아 도로가 에 띄엄띄엄 돌무더기를 쌓아 놓았던 모습이 생각나요. 돌무더기에는 골독 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재[고개] 마루에서 관리 방향으로 도로를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에 밭이 있고 가운데에 집이 한 채 있어요. 그 집 주변 둘레에 있는 산에 인접하여 활처럼 휘어진 도로가 나 있는데 이 도로가 옛 도로예요. {신ㅇㅇ(남성, 1952년생)}
□ 주워 온 골독은 어떻게 사용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비인면 성내4리에서 골독재 마루로 올라가는 현재의 도로가 과거의 소로였어요. 골독은 이 소로를 따라 올라가 다다르는 골독재 마루에서 친구들과 같이 주웠어요. 친구들과 골독재에서 주워 온 골독은 팔방놀이, 오징어놀이 등을 할 때 땅에 팔방이나 오징어 모양을 그릴 때 사용했어요. 마치 흑판에 선생님이 백묵으로 글씨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골독으로 땅에 그으면 하얗게 줄이 생겼어요. 주로 골독으로 땅에 금[선]을 그을 때 사용했어요. 다른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았어요. {신ㅇㅇ(남성, 1952년생)}
□ 골독재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으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우천으로 인하여 신작로 노면에 돌이 불규칙하게 밖으로 돌출되어 있으면 자동차 운행 시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땅 깎는 차’가 종종 평탄화 작업을 했어요. 그 차가 골독재를 지나가면 신기하여 몇 명의 친구들과 같이 차 뒤를 따라 쫓아갔던 기억이 생생해요. {신ㅇㅇ(남성, 1952년생)}
※ 조사자의 의견
옛날에는 산짐승인 곰이 많이 살던 재[고개]였고, 성내리에서 서천 쪽으로 가는 대략 800m 지점에 성황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 이 고을의 원님이 귀한 물건을 좋아해서 고을 사람들이 여러 가지 물건을 받쳤다. 그때 한 농부가 원님께 바칠 것이 없어서 이 산에서 나오는 곱돌을 캐서 깎아가지고 가자 도로 갖다 버리라고 해서 이 고개에 다시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골독이 골독재 있다는 정보는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언제부터인가 골독재라 불렸던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면서 구전(口傳)으로 자연스럽게 전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부모님을 포함하여 동네 어르신들이나 선배들부터 들었던 기억이 나요.
또한 제가 알고 있는 골독재를 후배들에게 자연스럽게 알려주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여전히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골독재라는 지명이 전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신ㅇㅇ(남성, 1960년생)}
※ 조사자의 의견
<골독재에서 관리 가는 옛길과 골독[곱돌]을 찾아서>
답사 연월일시 : 2022년 11월 24일 15:30~
나의 어머니 고향이 비인면 관리 ‘안이굴’이고, 그곳을 가려면 ‘골독재’를 지나야 한다. 지금도 ‘골독재’에서 관리 ‘안이굴’ 들어가는 옛길이 남아 있다. 옛길은 시골집에 갔을 때 어머니께 상세히 여쭈어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비인 성내리에서 2022년 11월 24일 오후 3시 30분경에 출발하여 어머니가 말씀해 주신 옛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나의 머릿속에 옛길과 함께 ‘골독[곱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11월이라 길 주변에 참나무 낙엽이 떨어져 길에 수북이 쌓여 있어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낙엽을 밟고 ‘골독재’에서 찾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골독재’ 입구에서 50m 정도 걸어갔을 때 낙엽에 덮인 길 가운데에 회색을 띠는 무엇인가 반짝이듯 눈에 띄었다. 발로 낙엽을 헤쳐 보았다. 앗! 직관적으로 곱돌일 거라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니 ‘골독’이었다.
사람들이 오래도록 걸었던 길이기에 곱돌(<사진 6>) 겉면이 반질반질 닳아 윤이 나고 있었다. 나는 발견의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을 떼지 못 했다. 아! 곱돌[골독]이다. 그래서 ‘골독재라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번득 들었다. 나는 그 ‘골독’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혹시 주변에 더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고, 나뭇가지로 낙엽을 치우니 그 주위에 여러 개의 다른 곱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보자 양희범은 1939년 산골 마을 구동리에서 삼형제 중 둘째로 출생했으나, 어려서 딸만 있는 작은아버지 집에서 양자로 자랐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경찰관이었고, 산도 있고 논도 한 열 마지기 있어 살기 괜찮았다고 한다. 불행히도 11세(국민학교 4학년) 때 6.25사변이 일어나 친부와 양부가 다 학살당해 집안이 어려워져 어린 시절 고생을 많이 하며 지냈다.
“내가 여기서 초등학교 밖에 안 나왔어유. 그래서 배우도 못하고 그냥 고생한 거유. 그렇지 안했으믄사 다만 중핵교라고 댕겼을지도 몰라요. 그저 국민핵교 바듯이 졸업해가지고서.“
잠시 서울로 ⦁⦁⦁ 해외로
고향에서 농사짓고 살다 1970년(30세)에 아내 송순덕(22세)과 결혼하고, 몇 개월 안 돼 서울로 나가 건설회사 철근 일을 했다. 이때 일이 많지 않아 살림이 어려웠다.
“그때만 해도 건설 붐이 없어가지고서 일이 한 달에 많이 허야 15일, 20일 못 했어유.”
그러다 중동 건설 붐이 일 때,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미륭건설에서 5년 동안 철근 일하며 힘들었어도 얼마간 돈을 벌게 되었다.
“77년 11월달인가 갔거든요. 그때만 해도 여기서 있는 것 보담은 나섯죠. 많이 벌었을 때는 쌀 20가마니 값도 받고 한 달에 그렇게 벌었죠.”
“사우디에서 일할 때 많이 힘들었죠. 암만해도 타국이고 날씨도 더웁고.”
1982년 귀국하여 서울에서 다시 철근 일을 하다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마음먹는다.
“겨울 같은 때는 일이 없고. 그러면 시골 가서나 그냥 농사지으면 맘이 젤 편코 그러것다 생각하고, 집이 식구 놓아 두고서나 내가 내려와 버렸어요.”
고향에 돌아와서
1984년 고향에 돌아와 그동안 번 돈으로 논(3000평)과 밭(1000평)을 사서 벼농사와 고추, 마늘, 양파, 생강,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고추는 5000포기 정도 심었고, 소도 대여섯 마리 키웠다. 그때 농사 수익이 괜찮았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쌀값이 괜찮았어요. 그때만 해도 쌀 한 말 갖다 먹으면 3일 4일 남의 집 일 해줘야 했어요.”
구동리 땅값이 다른 지역에 비해 비쌌는데 이유가 있었다.
“여기가 땅 금이 많이 비쌌어유. 나 여기서 논 살 때, 논 한 280평인가 되는데, 논이 7배민가 8배민가 되는데, 그것을 포크레인 대가지고서나 한 배미로 만들고 했는데, 저 화양뜰 그런 데보다 여기가 더 비쌌어요. 여기는 수랑논이라고 물이 계속 나오니까.”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여긴(서천) 뭐 지금은 도시가 되버렸는데, 하늘서 비오기만 기다렸지 농사를 못 졌어요. 물이 없어서. 계속 가물고 그러니까 모도 못 심고. 여기는 수랑논[수렁논]이라 그래도 물이 있어서 식량은 했죠.”
요즘 대부분 농가는 트랙터로 농사를 짓는데, 아내와 둘이 예전에 쓰던 경운기 관리기로 농사를 짓는다. 일손이 항상 부족하다.
“토지가 넓지도 않고 새로 장만하려면 돈도 많이 들어서. 그래도 일손이 바쁠 때는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이 와서 많이 도와준다.”
생산한 농산물은 주로 서울에 있는 친척이나 지인들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판매하고 남는 것은 장에 가서 판다.
“생강, 마늘, 고추 같은 건 서울 친척이나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팔아요. 그 사람들이 딴 사람 인자 연방 거시기 해주먼 여기서 택배루다 보내주고 그러지.”
“젊었을 때는 무서운 줄 모르고 오토바이 125CC에 가마니로 짐을 싣고 아내를 태우고 부여장, 은산장, 외산장에 가서 팔었유. 또 서천장 허구요. 갈[가을] 같은 때, 장항장 한산장도 갈 때 있고 그래요. 나머지 장은 한나절 장예요. 서천은 저녁때까지 서는데, 나머지 장은 한나절 서면 사람 몇 사람 안 나와요. 판교장도 스기는[서기는] 스는데[서는데] 사람 몇 사람 안 나와요.”
2008년부터 논 3000평 중 1500평은 농어촌공사에 5년 치 임대료를 한 번에 받고 위탁 임대하고, 나머지 논 1500평, 밭 1000평에 고추 마늘 양파 농사를 짓고 있다.
소회
제보자는 사람들이 다 외지로 도시로 떠나도 고향에 머물러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걸 가끔 후회하기도 한다.
“집이 식구는 절대 안 올라고 그랬는데, 내가 억지로 내려왔거든요. 그래서 집이 식구는 불만이 많아요. 지금까지 고생만 하고 그런 게. 집이 식구 말 들었으면 고생을 좀 들했을 텐데, 그때만 해도 서울서 어지간한 것은 한 5년 정도 해가지고서나 집 한 채는 그냥 거시기할 수 있었거든요. 거기서 집 한 채만 가지고 있어도 그냥 그랬는데, 인제 힘이 부쳐서 못 짓겄어.”
애국지사 김인두의 후손인 손자 2인(1950~60년대 출생)을 대상으로 면담한 내용을 글로 정리하였다.
□ 독립운동을 하신 조부의 인적 사항은 어떻게 되나요?
김(金) 인(印)자 두(斗)자이시고, 1897년 11월 25일에 전북 익산군 이리읍 신석리에서 출생하셨고, 1946년 7월 12일에 돌아가셨어요.
□ 독립운동의 동기는 무엇인가요?
애국운동을 하던 조부의 외종숙 김인전 목사님과 뜻을 함께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셨어요. 조부는 김인전 목사님의 한영학교 제자로 그분의 투철 한 나라 사랑의 정신과 민족사상의 영향을 받으셨어요. 김인전 목사님은 증조부의 한 살 위 재종 처남이셨고, 영명학교 교사인 증조부를 잘 알고 계셨어요.
□ 독립운동은 언제 하셨나요?
1919년 이전부터 시작하셨으며, 1919년 3월 29일 마산면 신장리 장날에 만세운동을 하셨어요.
□ 독립운동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1919년 3월 29일 마산면 신장리 장날에 송여직·송기면 형제 지사분들 외 여러 다른 지사분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셨어요. 이분들은 대부분 김인전 목사에게서 민족교육을 받은 한영학교 제자들이었어요. 지사분들은 늘 나라를 위해 걱정하며 국권회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심하셨죠. 그러던 중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이 공포되고, 군산에서도 3월 5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사들은 3월 29일 신장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셨죠. 조부의 저항운동은 수감생활 후에도 계속되었어요.
□ 독립운동 내용은 무엇인가요?
조부는 1914년 18세 때 영명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금산군 소재 금산보 통학교에 교직 발령을 받아 재직 중이셨어요. 1919년 당시 23세였던 조부 는 1919년 3월 29일 마산면 신장리 장날에 아주 극렬하게 만세 시위를 주도하셨어요. 조부는 동지들과 몇 날을 함께 밤새워 가며 태극기를 제작하 셨지요. 거사 당일에는 장에 나온 2000여 명의 군중들에게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도록 독려하셨어요. 당시 경찰들은 총으로 발포까지 하며 시위대에게 부상을 입혔어요. 이런 와중에 송기면 등 6명이 일경에 의해 강제 연행되자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조부 등 다른 지 사들이 시위대와 함께 경찰출장소를 습격하여 창문, 벽, 기물을 완파하는 등 강력한 시위를 벌여 그들을 구출하셨어요. 당시 출장소는 기둥과 지붕 만 남았다고 해요.
그 후 조부는 동지들과 시위자들과 함께 서천경찰서를 향해 진격하다가 모세다리 근처에서 사태 파악을 위해 말을 타고 오는 서천군수 권익채와 조우했을 때, 그가 3.1 만세운동 해산을 권고하자, 조부는 군수에게 태극기를 주며 당신도 조선 사람이니 말에서 내려 만세를 부르라고 호통을 치셨어요.
결국 주동자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조부도 압록강 검문소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공주감옥에 수감되셨어요. 전주와 군산의 삼일운동 배후였던 조부의 외종숙 김인전 목사는 조부와 자신의 작은 아버지(김영배 선생)께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에 있는 한영학교 운영을 당부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4월 초 상해로 망명하셨어요. 김인전 목사는 임시정부에서 여러 요직을 거쳐 마지막에는 임 시정부의정원 의장까지 지내셨죠. 김인전 목사가 떠나신 후 조부도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 망명길에 올랐으나 압록강 대교 검문소에서 일제 헌병의 저지를 받아 강제 귀가 조치를 당하셨어요. 법원의 재판 절차를 위한 조치였죠. 수형기록 카드에 다른 사람들과 달리 “소요죄” 외에 “도주” 죄가 첨가된 것은 이 사건 때문인 것 같아요.
그 후 조부는 일경에 넘겨져 공주지방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판결받고 공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셨어요. 출옥 후에도 조부는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어요. 조부는 금당교회에서 열린 전라도회 군산서북지방 서동교회(舒東敎會. 서천 동부지역 교회) 소제직회에서 구동 교회의 청원과 제직회의 의결로 구동교회의 “단독조사”(單獨助事)가 되셨어요. 당시 구동교회는 부설로 일광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조부는 이 학교의 교사로도 활동하셨어요. 이 학교는 구동학교라고도 불렸죠. 일광학교는 성인교육에도 힘썼는데 교사들과 학생들은 일제에 극렬히 저항했어요. 이때 조부는 앞장서셨고, 일경은 경찰서로 연행하여 고문을 반복하였다고 해요. 가족들은 늘 불안에 떨었다고 해요. 조부는 심한 고문으로 거의 폐인이 되시고 말았어요.
□ 독립운동 장소는 어디입니까?
서천군 마산면 안당리 127번지 일대, 한영학교, 구동교회, 서천출장소 일대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셨어요.
□ 독립운동을 함께 한 사람이 있습니까?
조부는 송여직, 송기면, 유성렬, 고시상, 양재흥, 박재엽, 나상준, 이동홍, 정 일창, 이승달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어요. 송여직 지사는 조부의 둘째 여동생의 시아버지이시므로 인척 관계이죠.
□ 독립운동을 하면서 겪은 고초가 있습니까?
조부는 1919년 3월 29일 신장리만세운동을 주도한 일로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언도 받고 1919년 5월 19일부터 수형생활을 시작하셨어요. 수감 중 각종 모진 고문들을 당하셨죠. 출옥 후에도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 하셨는데 일본 형사들에 의해 아홉 번이나 서천경찰서로 연행되어 거꾸로 매달려 고춧가루 물주전자 고문과 최후에는 전기고문까지 당하셨어요.
□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어떤 기록이 남아있습니까?
조부에 관한 독립운동 기록은 「판결문(대전8년형공제131호)」(공주지방법 원, 1919.5.19.)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3권(국가보훈처, 1987 년) 기록이 남아있어요.
□ 독립운동에 대한 정부의 보훈이 있는지요?
정부는 조부의 건국 공훈을 인정하여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서훈번호 19-000597)을 추서하였어요. 재정지원과 관련해서는 부친이 살아계실 때는 일정 금액 생활보조비를 받으셨는데 손자 대부터는 없었어요. 1945년 8월 15일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별세하신 경우에는 손자 대에도 적용이 되고 그 이후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 묘소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묘소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333-1에 있는 선영에 모셔져 있어요.
□ 후손으로 조부의 독립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시 개인이나 가정에 극심한 고통을 주었던 독립운동이었지만,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나라의 국권 회복에 기여한 측면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3.1독립운동은 임시정부 수립의 원동력이 되었고 다양한 형태의 민족운동의 발원지가 된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보아요. 3.1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어야 하고, 후손들에게 전승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독립운동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우리나라가 건재한 것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희생한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나라 사랑의 정신과 실천의 산물이라고 생각해요. 나라가 있어야 나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애국 선혈들처럼 내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충실히 감당하고 후손들에게 나라 사랑의 정신을 물려주는 것이 곧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 독립운동의 후손으로 어떤 바람이 있습니까?
일제강점기에 불의하고 무도한 일본에 저항하여 모든 국민이 거국적으로 일어나 국권을 회복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일궈온 것처럼, 나라의 지도자들과 국민이 하나가 되어 냉혹한 국제관계 속에서도 나라를 굳건히 수호하길 바래요. 과거 못지않은 경제성장과 번영을 이루어 세계 모든 나 라에 영감을 주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남북통일도 이룰 수 있기를 바라고, 또 한중일 동아시아 국가들도 과거의 아픈 감정들 을 청산하고 유럽의 나라들처럼 서로 화친한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 독립운동을 하실 때 가정환경은 어떠했습니까?
군산 영명학교 교사이셨던 증조부가 1917년에 별세하셨기 때문에 조부께서는 당신 어머니와 아내, 세 여동생과 함께 남게 되셨지요. 하지만 조부께서는 독립운동 하신다고 가족들은 거의 돌보지 못하셨죠. 더구나 감옥에 가셨을 때는 유족들의 생계가 막막하였고, 출감 후에도 계속 경찰서에 끌려다니실 뿐 아니라 구타, 고춧가루 물고문, 전기고문 등으로 정신장애까지 얻어 집안 살림을 돌볼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가정이 풍비박산이 된 상태였어요.
□ 독립운동을 인정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습니까?
제 부친께서 조부의 독립운동기록을 찾기 위해 처음에는 한영학교, 영명 학교, 금산학교 등을 방문하며 무슨 흔적이라고 찾고자 노력하셨어요. 하나같이 다 불타서 아무것도 남은 것은 없다는 말만 듣고 허탈해하셨으나 결국에는 공주지방법원, 기록보존소에서 당시 기록이 부산으로 이관되었다는 말을 듣고 거기까지 가셔서 찾을 수 있게 되었어요.
□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만나는 모임이 있습니까?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에 있는 광복회세종특별자치시 지부에 참여하고 있어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월 2회 정규모임을 갖고 있죠. 저는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지부에서는 순국선열 및 독립유공자의 희생정신 계승‧승화사업, 독립유공자 후손을 위한 장학사업, 독립운동 사적 발굴 및 보전사업, 독립운동 관련 홍보활동 강화 사업, 광복회원의 권익신장, 복지증진 및 상부상조 사업 등을 하고 있어요.
제보자는 대목장 무형문화재 정영진 선생의 장남인 정해천(남성, 1949년 9월 19일생)이다. 그의 구술내용을 정리하고, <시사 뉴스저널> 2010년 12월호에 실린 정영진 선생의 생전 인터뷰 내용과 사진을 참고하였으며, 제보자와 함께 서천 여러 곳에 남아있는 정영진 선생의 건축물들을 답사하며 사진으로 담아보았다.
1. 아버님이 대목장(도편수)이셨다면서요?
할아버지부터 목수이셨어요. 할아버지(정규철)께서는 증조할아버지께 한학도 배우셨으나 너무 가난해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목수를 시작하셨어요. 아버님도 16세부터 목수 조수로 따라다니기 시작하였다가 그 뒤 할아버지와 함께 소수서원(紹修書院) 복원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시면서 본격적으로 대목장의 길을 걷게 되셨다고 해요. 아쉬운 것은 할아버지께서 너무 일찍(52세)이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심적으로 많이 힘 드셨을 거라 생각이 들어요. 소수서원 보수공사 때(1953년), 책임자이신 할아버지께서 병환으로 쓰러지셨어요. 그때 아버님은 31세셨는데, 아직 아버님을 믿지 못하는 서원관리소 측을 설득하여 일을 맡았고, 공기를 당겨 잘 마치면서 실력을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셨어요. 그 뒤로 청주 보은에 있는 법주사와 운현궁, 전국의 관아·사찰·사원 등 수 많은 건축물들을 신축·보수·자문하며 일생을 사셨어요.
-1921년생이신 아버님은 1981년 2월에 문화재관리국 지정 문화재 수리기술자 제 1호<문화재기능보유자 제1(101)호>로, 1990년부터는 <무형문화재 제10호 서천대목장>으로 지정되셨어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90세가 넘도록 문화재 복원 및 수리, 서원이나 사찰의 신축·감리 일 등을 하셨어요. 아버님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라도 다니시며 쉬지 않고 하셨어요.
-1982년도에 대목장 분야가 신설돼 아버님이 1세대 보유자가 되셨어요. 그 후 거의 70년을 일하셨으니, 1세대와 2세대 분들 모두와 같은 시대를 아우르며 일을 하셨을 거예요.
일제에 의해 많은 문화재가 훼손되었는데, 1930년대를 지나며 차츰 문화재를 복원하는 사업이 거국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아버님처럼 대목 일을 하시는 분들의 참여 기회가 많아졌다고 들었어요.
2.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말씀해주세요.
-아버님은 7남매를 두셨어요. 제가 장남이며 한때는 아버님을 따라 작업 현장에도 따라다니며 일을 조금 배운 적도 있었어요. 저에게 정직하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살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아버님이 전국을 오가며 현장을 다니시다보니 아래로는 제주도까지도 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다니셨어요. 그러다보니 짧게는 몇 주에서 여러 달씩 집을 비우시곤 해서 어머님을 도와 집안일을 도와야했어요. 아버님이 연로해지신 후에는 현장을 오가실 때 운전을 해드리느라 많은 현장들을 아버님과 함께 돌아볼 수 있었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가까운 서천 이외의 건축물들을 돌아본 적은 없지만, 아직도 아버님과 함께 다녀온 곳들에서의 많은 추억들이 생생합니다. “목수는 먹통에 물이 마르면 안 된다.”라는 말씀 속에 가족들의 생계에 대한 부담도 크셨던 것을 느꼈어요. 내 나이 70이 넘고 보니, 아버님께 아들로서 잘 못하고 뜻을 잘 받들지 못한 것들만 후회로 남아있어요.
3. 할아버님을 따라 아버님이 목수를 시작하시고 대목장이 되셨는데, 아버님 대를 이을 생각은 없으셨나요?
-2009년 9월에 후손들이 아버님의 노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공적비를 세워드렸지만, 그 기쁨보다는 후계에 대해 걱정이 크셨어요. 제가 젊어서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아버님을 따라 다니기는 했지만, 내가 몸도 약한 편에다 집을 자주 비우시는 아버님 입장에서 장남인 제가 어머님을 도와 집을 지키기를 원하셨어요. 저도 나무에 대해서 잘 알아야하고, 현대건축에 비해 한옥건축은 너무 어렵다는 생각에 아버님처럼 잘 할 자신도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저 아버님이 대단하셨고, 너무 존경스러울 뿐입니다.
-아버님을 따라 목수 일을 하셨던 작은아버님(정국진, 1934년생)께서 <문화재수리기술자 목수기능자 제160호>이고, 서천대목장 조교로 아버님 직계후계자로 계셨어요. 그런데 무형문화재 지정을 한두 달 앞두고 돌아가셔서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죠.
* 조사자 의견 : 제보자와의 여러 번에 걸친 면담을 통하여, 제보자는 아버님이 대목장으로 큰 업적을 남기셨으나 대를 잇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그 어려운 시절에 가족을 위해 타지를 고향삼아 다니시며 수고하신 아버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새로운 우리 지역의 가치 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채록하고 공유하는 마을기록활동가로서의 임무에 더 집중하자고 다짐을 해본다.
시초면 후암2리 지명을 아는 주민 3인(1940~60년대생)을 대상으로 면담한 내용을 글로 정리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1차 때 마을 주민을 만나 자연마을과 지명을 개략적으로 파악하였다.
파악된 지명에 대해 관련 문헌과 인터넷을 검색하여 지명 유래를 정리했다. 2차 때 마을 주민을 만나 자연마을이나 해당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주민들 스스로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시간이 걸릴 때는 사전에 문헌이나 인터넷에서 수집한 내용을 조금 알려주고 가능한 주민들이 지명의 유래를 알아내도록 하였다. 최종적으로 주민들과 지명의 유래를 검토하고 토의하여 결정하는 단계를 거쳤다.
□ 후암리 자연마을을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후암2리에는 갓점, 부아티, 안상굴, 유둑배라는 자연마을이 있어요. 현재 이 마을은 모두 주민이 거주하고 있어요.
※ 조사자 의견
후암리는 조선 초에 서천군이었고 조선 말 서천군 시왕면(時旺面)의 지역 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갈물리(曷勿里) · 유도리 (有道里) · 후동리(後洞里) 일부와 한산군 하북면(下北面) 신리(新里)의 일 부를 합쳐 후동(厚洞) · 유도암(有道岩)의 이름을 따서 후암리라 해서 서천군 시초면에 편입된 마을이다.
후암2리는 길산천을 경계로 하여 후암1리와 뚜렷하게 마을이 구분되고 있다. 길산천은 서천군 최대의 금강지류로 길이 23.0㎞이다. 문산면 금복 리 원진산(269.9m)에서 발원하여 남류하고 화양면 망월리에서 금강으로 유입한다. 시초면 후암리를 지나는 길산천의 길이는 2.3km이다. 문산면, 마산면, 시초면, 기산면, 서천읍, 화양면, 마서면의 7개 읍·면이 길산천 유 역에 위치하고있다.
□ 마을이 [앞], [뒤]의 위치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부아티가 있어요. ‘부아티’는 마을이 밭 뒤에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아요.
※ 조사자 의견
부아티는 밭과 관련된 지명으로 생각된다. ‘밭뒤’->‘밭이’->‘바티’->‘부아티’로 어형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주민에 의하면 예전에 마을 앞쪽으로 밭이 있었지만, 경지정리를 하면서 밭이 논으로 지목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 마을이 안팎의 위치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안상굴이 있어요. ‘안상굴’는 산의 안쪽에 마을이 위치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생각해요.
※ 조사자 의견
안상굴에서 ‘안[內]’이라는 글자는 어떤 장소의 내부를 의미한다. ‘안상굴’ 은 산과 관련하여 마을이 산의 안쪽에 위치하므로 ‘안산골’이라고 부르다가 발음할 때 편의상 안산골이 ‘안상굴’로 부르기 쉽게 어형이 변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물건의 생산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갓점이 있어요. ‘갓점’은 옛날에 갓(笠)을 만드는 사람이 살았고, 갓을 파는 점포가 있어서 갓점이라고 부르게 된 것 같아요.
※ 조사자 의견
조선시대 여러 지역에 갓을 만드는 사람이 살았거나 갓을 만들어 파는 점포가 있으면 ‘갓점’이라고 불렀다. 하나의 예로 서천군 기산면 화산리에 갓점이라는 마을이 이에 해당한다. 어떤 마을은 형상이 갓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 부여 입포라는 마을이 이에 해당한다.
조선 후기 영조 시대에 면(面), 리(里)명을 보면 시방동면에 입점리(笠店 里)가 있었다. 입점은 갓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조 때까지 ‘입점이라 고 부르다가 그 이후 언젠가부터 ‘갓점’이라고 불린 것으로 생각된다.
□ 새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매봉산이 있어요. 산 모양이 마치 매처럼 생겼다고 해서 ‘매봉산’이라고 불러요.
※ 조사자 의견
‘매’를 응(鷹)의 뜻으로 보아 ‘매처럼 생긴 산’, ‘매가 앉아 있는 모양의 산’, ‘매를 놓아 산양하던 산‘ 등으로 해석한다. 또는 ’매‘를 ’山(산)‘을 뜻하는 일반 명사 ’뫼‘의 다른 형태로 보고 주변 가까이에 있는 산이어서 ’매 ‘라고 했다가 ’산봉우리‘임을 분명히 보이기 위해 한자 ’봉(峰)‘을 덧붙여 ’ 매봉‘이라고 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따라서 매봉’은 ‘산’을 뜻하는 두 요소가 중첩된 어형이 된다. ‘매봉’에 ‘봉(峰)’과 의미가 같은 ‘산(山)’을 덧붙여 ‘매봉산’이라고 부른 것이다. 후암2리에 있는 매봉산의 높이는 84.0m이다.
□ 가축의 형상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유둑배[유동바위, 유도암]가(이) 있어요. ‘유둑배[유동바위, 유도암]의 유래는 매봉산 꼭대기에 바위가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우두(牛頭)바위 또는 유독바위라고 불러요. 그리고. 이 바위 아래에 있는 마을을 유둑배{유동바위, 유도암(有道岩)}라고(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마을 사람들은 ‘유둑배’라고 많이 불러요.
※ 조사자 의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왕면에 유도리(有道里)가 있었다. 매봉산에 있는 바위 형상이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우두(牛頭) 바위 또는 우두암(牛頭岩)이라고 했다. 처음에 우두바위[우두암]라고 부르다가 발음 편의상 어형이 다양하게 변형되어 바위 이름은 유독바위라고 부르고, 마을 이름은 유둑배, 유동바위, 유도암이라고 부른 것 같다.
시초면 후암1리 지명을 아는 주민 3인(1940~60년대생)을 대상으로 면담한 내용을 글로 정리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1차 때 마을 주민을 만나 자연마을과 지명을 개략적으로 파악하였다.
파악된 지명에 대해 관련 문헌과 인터넷을 검색하여 지명 유래를 정리했다. 2차 때 마을 주민을 만나 자연마을이나 해당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주민들 스스로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시간이 걸릴 때는 사전에 문헌이나 인터넷에서 수집한 내용을 조금 알려주고 가능한 주민들이 지명의 유래를 알아내도록 하였다. 최종적으로 주민들과 지명의 유래를 검토하고 토의하여 결정하는 단계를 거쳤다.
□ 후암1리 자연마을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후암1리는 뒷굴, 용두쟁이[용두정], 후동, 분덕골, 안텃굴, 원당굴이라는 자연마을이 있어요. 주민이 사는 마을은 뒷굴, 용두쟁이[용두정], 후동, 안텃굴이고 분덕골, 원당굴은 사람이 살지 않아요.
※ 조사자 의견
후암1리는 길산천을 경계로 하여 후암2리와 뚜렷하게 마을이 구분되고 있다. 길산천은 서천군 최대의 금강지류로 길이 23.0㎞이다. 문산면 금복 리 원진산(269.9m)에서 발원하여 남류하고 화양면 망월리에서 금강으로 유입한다. 시초면 후암리를 지나는 길산천의 길이는 2.3km이다. 문산면, 마산면, 시초면, 기산면, 서천읍, 화양면, 마서면의 7개 읍·면이 길산천 유 역이다. 후암1리는 문산면 지원리, 시초면 풍정리, 시초면 봉선리와 인접 하고 있다.
□ 마을이 [앞], [뒤]의 위치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뒷굴과 후동(後洞)이 있어요. ‘뒷굴’은 마을이 뒤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렇게 부르고 있어요. ‘후동’은 뒷굴을 한자로 부르는 마을 이름이라는 생 각이 들어요.
※ 조사자 의견
뒷굴과 후동은 똑같이 마을이 뒤[후]에 있다는 의미이다. 조선 후기 영조 시대 면(面), 리(里) 체제에 의하면 시방동면(時方洞面)에 후동리(後洞里)가 기록되어 있다. 후동(後洞)은 뒷굴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생겨난 마을 이름인 것 같다. 뒷굴과 후동(後洞)의 차이는 한자 後(뒤 후)에서 훈을 빌려서 ‘뒷굴’, 음을 빌려서 ‘후동’이라고 명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후동이라는 마을명은 뒷굴을 포함하여 후동리라고 부르다가 리(里) 명칭이 개편되면서 ‘후동리’는 없어졌지만, ‘후동’이라는 명칭만이 남게 된 것 같다.
□ 용[왕]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용두쟁이가 있어요. ‘용두쟁이’는 마을의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고, 용두정(龍頭亭)이라고도 해요. 용두쟁이는 뒷굴 동쪽에 자리 잡고 있어요.
※ 조사자 의견
‘용두쟁이’는 처음에 ‘용두정이’라고 부르다가 발음 편의상 ‘용두쟁이’로 어형이 변형된 것으로 생각된다. 용두정(龍頭亭)이라는 이름은 ‘지형이 용의 머리같이 생겼다’라고 하여 부르고 있다. ‘용두정’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접미사 ‘정(亭)자로 보아 옛날 이곳에 정자(亭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묘지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분덕골재가 있어요. ‘분덕골재’는 공동묘지가 있어 ‘분덕골’이고 이곳을 지나서 풍정리로 넘어가는 고개이기 때문에 ‘분덕골재’라고 부른 것 같아요. 분덕골 입구에 들어서면 예전에 어떤 가난한 사람이 벽돌 대신 뗏장으로 벽을 쌓아 지은 뗏장집이라고 부르던 주막집이 있었어요.
※ 조사자 의견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서 ‘분덕골’이라는 지명이 나타나고 있다. 이 지명은 주변에 공동묘지가 분포하고 있어 ‘분덕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는 분청 사기 등을 굽는 분토가 나와서 ‘분토골’일 수도 있다. 그런데 시초면 후암리 분덕골은 주변에 공동묘지가 있고, 예전에도 이곳에 고려장이 많이 나왔다고 함으로 공동묘지와 관련이 깊은 지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덕골재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형이 변화되어 부르기 쉽게 부덕골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천군의 행정지도에는 부덕골재라고 기록하고 있다.
□ 마을이 안팎의 위치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안텃굴이 있어요. ‘안텃굴’은 마을이 골짜기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 조사자 의견
안텃굴에서 ‘안터’라는 말은 어떤 장소의 내부인 안[內]쪽을 의미한다. 안텃굴은 마을이 골짜기 안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안텃굴은 조선시대 이괄의 난 당시 천안 군수를 지내던 사람이 이곳으로 난을 피해 와서 살게 된 것이 현재 이 마을에 사는 고성이씨의 16대 선조라 하며, 그로 인해 고성이씨가 많이 살아왔던 마을이다.
□ 무속 신앙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원당굴이 있어요. ‘원당굴’은 주변 지역에 잘 알려진 여자 무당인 ‘당골’이 살고 있는 골짜기라서 그렇게 부른 것 같아요. 실제로 원당굴에는 여성 무속인인 무당이 1990년대 말까지 살았어요.
※ 조사자 의견
토속신을 제사 지내는 사당(詞堂), 당산(堂山)이나 또는 무당(巫堂)이 있던 곳에는 ‘당골[堂谷]’이라는 지명이 붙여진 곳이 많다. 특히 여자 무당을 ‘당골’이라고 한다. 당(堂)에 대한 지명은 당곡(堂谷), 원당(元堂), 사당(舍堂) 등의 형태로 전국 곳곳에 남아 있다. 원당굴은 원당이 있었던 골짜기 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을 주민에 의하면 ‘후암1리에 속하는 원당굴에는 여러 채의 집이 있었고 그중에 신내림을 받아 신을 섬기며 굿을 하는 여성 무속인이라 불리는 무당이 활동하는 법당이 차려진 집이 존재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 숨어 있다는 뜻인 은(隱)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엉고개가 있어요. ‘엉고개’는 마을에서 혼자 지나가려면 음침하여 무서웠던 고개였어요. 고개가 제법 길고 인적이 뜸한 산속을 지나 넘어가는 고개여서 그렇게 부른 것 같아요.
※ 조사자 의견
엉고개 너머에 사는 주민들에 의하면 옛날에 고개가 길기도 하고 음침하여 혼자 걷기에는 무서운 길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또한 고개 넘을 때 돌은 던지던 서낭당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지명 ‘엉고개’는 ‘엉’과 ‘고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엉’은 경상도와 전라남도에서 낭떠러지를 말하는 방언이다. 또 다른 뜻은 ‘엉’은 ‘어은’의 변화형으로 어은고개->언고개->엉고개’로 될 수 있다. ‘어은고개’은 대부분 ‘은고개’과 함께 쓰임을 볼 때, ‘엉고개’ 또한 ‘은고개’와 대응시킬 수 있다. ‘은고개’는 ‘은(隱)’과 관련하여 숨은 고개로 해석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엉고개는 숨은 고개의 의미와 더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비인면 선도리 지명을 아는 주민 3인(1930~60년대생)을 대상으로 면담 내용을 글로 정리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 선도리 자연마을을 아는 대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선도리는 솔머리, 용수말, 왕마지[양마지]라는 자연마을이 있어요.
※ 조사자 의견
선도리는 서해 연안에 접하고 있으므로 마을이 대부분 평지에 분포하고 있다. 선도1리에 솔머리, 선도2리에 용수말, 선도3리에 왕마지 자연마을이 있다. 왕마지는 동네에서 양마지라고 부른다. 솔머리에는 묘금도(卯金刀) 유씨(劉氏)와 밀양(密陽) 박씨(朴氏)의 집성촌이 있다.
□ 나무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솔머리와 솔안이 있어요. ‘솔머리’는 옛날부터 소나무가 무성하여 마을이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솔머리, 송두(松頭)라고 하지요. ‘솔안’은 솔머리에서 북동 방향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 조사자 의견
해안에 인접하여 자라는 소나무인 해송은 바람에 의해 형성되는 사구(砂丘)의 모래를 고정시켜 주고, 바다에 인접한 동네에 겨울철 차가운 북서 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해안에 소나무가 무성하여 그것이 마을을 대 표하는 상징물이 된 것이다. 우리 눈에 잘 띄는 외형적인 자연물이 마을 의 지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솔머리는 바다에서 배가 들어오는 곳이므로 배들이, 선입(船入), 선임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는 솔머리는 배들이 지역으로 선동(船東)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선서(船西)로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최근에 ‘솔머리’라는 지 명이 자연마을을 대표하고, 그 밖에 송두(松頭), 배들이, 선서라고도 부른다. 솔머리는 해안선과 거의 평행하게 북서-남서 방향으로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북서 방향에 있는 마을을 큰뜸, 남서 방향에 있는 마을을 작은뜸이라고 불렀다. ‘뜸’은 한동네 안에서 여러 채의 집이 따로 모여사는 구역을 의미한다. 큰뜸과 작은뜸은 모여있는 것은 같지만, 많이 모여 있으면 ‘큰뜸’이고 적게 모여있으면 ‘작은뜸’이 된 것이다. 마을 명칭이 규모를 기준으로 나누어졌다. 또한 솔머리의 작은뜸 동쪽에 솟대가 있었던 곳을 솟대배기라고 불렀다. 또한 솔머리와 솔안은 서로 관련이 있는 명칭이다. 따라서 솔머리에 속하는 마을은 ‘큰뜸’, 작은뜸‘, ’솟대배기‘가 있고, 별도로 솔안이 있다.
□ 용[왕]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용수말, 왕마지[용지]가 있어요. ‘용수말’은 지형의 형상이 용의 머리 부분 같은 마을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러요. 용수말은 ‘배들이’라는 마을에서 볼 때 동쪽에 위치하므로 선동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또한 용과 관련되는 마을은 용지 또는 왕마지[양마지]가 있어요. 이곳은 용이 하늘로 승천한 용못 옆에 있으므로 그렇게 부르는 마을 이름이지요.
※ 조사자 의견
선도2리에서는 대표지명으로 선동보다는 용수말이라는 마을명을 많이 사용한다. 배와 관련된 지명보다는 용과 관련된 지명을 선호하고 있다.
선도3리에서는 마을명을 용지보다 왕마지[양마지]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용지 또는 용못에서 앞에 용의 글자는 용(龍)으로 같은 한자지만 뒤에 ‘지’와 ‘못’이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사용하는 차이이다. 즉, 한자 池(못 지)에서 음은 ‘지’이고 훈은 ‘못’이 된다. 따라서 음을 빌리면 ‘용지’이고 훈을 빌리면 ‘용못’이 된다. 둘 다 용이 하늘로 승천한 ‘지’와 ‘못’이 되어 용지 또는 용못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용지[용못]에서 용(龍)은 왕(王)을 상징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마을명인 왕마지는 한자로 王馬池(왕마지)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도 용지[용못]과 왕마지에서 ‘용’자와 ‘왕’자가 대응하고 ‘지(못)’자와(가) ‘지’자와 대응하고 있어 글자만 다르고 의미는 같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선도2리 마을은 용수말 또는 선동이라 부르고, 선도3리는 왕마지 [양마지] 또는 용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 솟대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솟대배기가 있어요. ‘솟대배기’는 옛날에 솟대가 있던 자리라 하여 그렇게 불렀어요. 옛날부터 동네 어른들께 들어서 알고 있어요.
※ 조사자 의견
솟대배기는 옛날에 수호신으로 모셨던 솟대가 박혀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마을 풍어제(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배가 있는 집만 각자 지내고 있다. 솟대 부근에 솟대배기샘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마을의 상징이 되거나 마을의 중심이 될 만한 것이 마을에 있으면, 그것이 마을 이름의 소재가 되었다. 솟대는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혀 마을 수호신으로 믿는 상징물이다. 솟대배기는 배들 이 동쪽에 있는 터이다. 솟대배기터는 솔머리에서 용수말 입구까지라고 알려져 있다.
□ 군사와 방어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망생이가 있어요. ‘망생이’는 선도리 앞바다로 침입하던 적을 방어하기 위해 망을 보던 곳이어서 망생이라고 불러요. 예전에 동네 어른들은 망생이를 망선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나요.
※ 조사자 의견
망생이 마을은 인근의 송산(宋山)에서 키운 소나무를 베어 덤장을 만드는 목재를 대어 주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망생이는 망을 보던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던 지역이기도 하다.
망생이는 풍수지리적으로 ‘배 형국’이라 집에 재물이 모이면 배가 무거워져 가라앉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부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마을을 떠났다 고 한다.
□ 고개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오얏재가 있어요. ‘오얏재’는 선도리에서 성내리로 넘어가는 고개지요. 옛 날에 아주 좁은 외길이었어요. 아마도 그래서 오얏재라고 부른 것 같아요. 동네에서 땅을 사서 좁은 길은 넓혔어요.
※ 조사자 의견
예로부터 비인면 선도리와 성내리를 왕래가 빈번했던 중심이 되는 고개 였다. ‘오얏’은 우리말에서 오랜 옛날에 '어버이, 크다'라는 의미로 쓰였었 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 고개는 선도리에서 성내리를 왕래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길이었으므로 ‘오얏재’라고 불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장래 풍습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영정 모탱이(모퉁이)가 있어요. ‘영정 모탱이’는 고인의 사진을 검정색 액자에 끼우고 검정색 리본을 두른 것을 영정(影幀)이라고 하는데, 돌아가신 분을 상여로 운구할 때 앞에서 영정을 모시고 가지요. 영정을 들고 산모탱이를 돌아가는 데서 ‘영정 모탱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 조사자 의견
상여 나갈 때 고인이 생전에 다니던 길이나 많이 즐겨 찾았던 장소를 거쳐 운구하게 된다. 선도리 마을에서도 상여가 출발하면 운구가 시계 방향으로 상여가 이동하는데 고인의 영정을 들고 다리도 건너고, 모퉁이도 지나는데 특히 영정이 건너는 다리를 ‘영정 다리’라고 부르고, 영정이 지나가는 산모퉁이를 ‘영정 모탱이’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 둠벙[샘]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참삿골이 있어요. ‘참삿골’은 찬물이 나는 둠벙이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에요. 둠벙의 크기는 긴 변이 6m, 작은 변이 4m 정도 되었어요. 둠벙의 물이 차서 여름철에 그물로 친구들과 같이 상체를 굽혀 엎드린 채로 친구의 도움을 받아 허리에서부터 목까지를 물로 씻었던 등목이 생각나요. 물이 너무 차고 시원해서 자주 사용했던 기억이 있어요.
※ 조사자 의견
‘참삿골’에 있는 둠벙[샘]은 가장 위쪽에 있는 다랑논에 있었다. 참삿골은 차가운 둠벙[샘]이 있어서 처음에 찬샘골로 불리다가 부르기 쉽게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매립되어 볼 수 없다. 아마도 물이 너무 차가워 농업용수 등 사용이 어렵기도 하고, 지하수가 보급되면서 매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 도난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도적골이 있어요. ‘도적골’은 옛날 가난한 시절에 마을에서 물건을 많이 도둑맞아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사람들이 이 마을을 지나 종천을 거쳐 판교우시장을 다녔다고 동네 어른들께 들은 적이 있어요.
※ 조사자 의견
도적골은 사람들이 시장을 다니는 길목이기 때문에 도둑을 많이 맞은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동네의 인심이 흉흉해져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쇠퇴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섬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쌍도가 있어요. ‘쌍도’는 비인 갯벌에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래서 쌍도라고 불러요. 전설도 전해져요. 최근에는 쌍도 주변의 갯벌에서 맛조개를 잡는 등 갯벌 체험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쌍도는 현재 사유지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개발에 어려움이 있기도 해요.
※ 조사자 의견
1) 쌍도에 대한 고문헌 기록 내용
조선시대에 작성된 고지도에는 쌍도가 나와 있다. ‘호서지도’와 ‘해동지도’의 비인현 지역에는 섬이 나란히 있다는 의미로 ‘竝島(병도)’라고 표 시되어 있다. 특히 ‘호서지도’의 여백에는 쌍도에 대한 설명이 추가되어 있는데 ‘竝島周回四里居住民無居官門七里’라고 적혀 있다. 이는 병도(쌍 도)의 둘레는 4리(1.6km)이며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 없고, 관아까지의 거리는 7리(2.8km)이다‘라는 의미이다.
2) 쌍도에 대한 전설
전설 1
쌍도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무인도이며, 옛날 쌍둥이를 둔 홀아비가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죽자 아들 쌍둥이가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다 죽어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설 2
’이무기와 김총각‘이라는 전설이 있다. 선도리는 옛날에 홍수가 나면 금강 상류로부터 떠내려 오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큰 집, 죽은 돼지, 통나무 등이 떠내려왔으며 이런 것들은 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가 되었다. 그래서 홍수가 나면 바닷가에 사람들이 모여 무엇이 떠밀 려 오는지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어느 해인가 홍수가 났는데 물 중간에 큰 통나무가 떠밀려 오고 있었다 고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큰 나무는 갖게 되면 소득이 되기 때문에 서로 가지려고 하였다. 이웃 동네에 사는 ’김 총각‘이라는 사람이 큰 통나무 를 먼저 갖기 위해 물을 헤엄쳐서 갔다고 한다. 그런데 헤엄쳐서 건너가 보니까 통나무가 아니라 수염이 난 용과 큰 구렁이 사이의 이무기였다. 그래서 김 총각이 홱 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무기가 김 총각 뒤를 쫓았다. 물속에서는 이무기를 사람이 속도로 이길 수 없지만 꼭 잡아먹히게 생겼는데도 이무기가 사람을 못 잡았다고 바닷가에서 사람이 여러 명이 보았는데, 김 총각이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날고 있었다. 그래 서 이무기는 김 총각을 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알고 보니까 김 총각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있었는데, 위급한 상황이 되어 김 총각이 날았던 것이다. 그런데 옛날에 기인이나 이상한 장수가 나 오면 역적질을 한다고 생각하여 없앴다고 한다. 김 총각의 집안에서도 문중회의를 하여 집안의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해 김 총각이 자고 있는데 팔 다리를 꽁꽁 묶고 날개를 잘라 버렸다. 그래서 날개를 자르자 피가 천장까지 솟구쳤지만 그래도 날개가 붙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날개를 붙지 못하게 하려고 재를 뿌려 결국 그 총각은 죽었다고 한다.
김 총각을 쫓았던 이무기는 쌍도에서 나왔다. 쌍도의 꼭대기 밑에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가 있는데 거기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용이 되기 직전에 홍수가 나서 바람결에 밖에 나왔다가 이런 일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그 후 십년 공을 들여 하늘에 올라가려고 하는 순간에 임산부가 그 장면 을 목격하였고 부정 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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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개요
생산자료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 선동역이 있는 자연마을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선도리 자연마을은 선도1리인 솔머리[배들이, 송두, 선서], 선도2리인 용수말[선동], 선도3리인 왕마지[용지]로 나누어져요. 선동역은 선도2리인 선동[용수말]에 건설될 예정이었어요.
□ 선동역이 위치하려 했던 고도는 어느 정도 되나요?
선도리는 대부분 지형이 평지인데, 선동역이 위치하려 했던 곳은 지형적으로 해발고도 10~20m 내외의 낮은 구릉지였어요. 그 고도에 건설하려고 했어요.
□ 역의 이름이 왜 선동역으로 붙여졌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철도 노반이 ‘선동(용수말)’이라는 마을을 지나가면서 그곳에 기차가 교행하는 선로, 화물 처리 플랫폼, 기차 역사(驛舍) 등이 들어설 역을 건설하려고 했기 때문으로 생각돼요.
보통 기차 역명은 역이 위치하는 지역의 지명을 빌려 작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역이 ‘선동’이라는 마을에 위치하기 때문에 ‘선동역’이라고 붙여진 것으로 보여요. {임ㅇㅇ(남성, 1944년생)}
□ 로깡이 선동에 100여 개 이상 있는 곳의 상황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로깡이 있는 곳은 ‘선동’이라는 마을이에요. 행정명으로 선도2리에 속하고 자연마을의 이름은 ‘용수말’이라고 해요. 선동역은 로깡이 있는 곳을 포함하여 450m 정도 정거장 유효거리가 돼요. 따라서 선동역은 로깡이 있는 곳은 틀림없이 포함된다고 볼 수 있어요. 제1공구장인 이ㅇㅇ의 동생이 시공사 삼부토건 사무장이었는데 그가 언덕 너머에 역이 있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또한 우리 밭이 선동역사 예정 부지 안에 있었어요. 지금도 로깡 주변의 토지는 지목이 철도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임ㅇㅇ(남성, 1944년생)}, {정ㅇㅇ(남성, 1948년생)}
□ 역이 건설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1960년대 당시 지금처럼 어떤 시설물이 지역이 들어올 때 찬반을 따지는 시대는 아니었어요. 비인공업지구 건설이 취소되면서 그에 따라서 비인선 건설이 중단되었고 자연히 선동역도 건설이 무산된 것이지요.
우리는 비인공업지구 건설이 취소된 이유 중의 하나로 당시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비인에서 울산으로 공단 조성 계획이 변경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임ㅇㅇ(남성, 1944년생)}
□ 선동에 역이 건설된다는 정보는 누구에게 들으셨는지요?
삼부토건 제2공구장 이ㅇㅇ의 동생이 당시에 시공사 삼부토건 사무장이었는데, 그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또한 하동 영감이라는 분이 스데바[사토장]에서 노반 평탄화 작업을 함께 하면서 선동마을을 가리키며 “이쪽이 역이래”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선동에 역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임ㅇㅇ(남성, 1944년생)}
□ 선동역이 건설되면서 선도리 땅값에 영향을 주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 니까?
당시 공단 건설 등 개발 지역에 땅값이 오르지 못하도록 지역 고시를 하였어요. 그리고 선도리 구간은 공장이 들어서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영향은 받지 않았어요. {임ㅇㅇ(남성, 1944년생)}
□ 지금까지 로깡을 철거하지 못한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현재 로깡 100여 개 이상이 설치되어 있는 곳은 배수로가 지나는 철도 노반으로 로깡 전체의 1/2이 안 되는 로깡은 흙으로 덮여 있고, 1/2이 조금 넘은 로깡은 노출되어 있어요.
비인공단 취소로 제2공구 구간도 철도 노반공사가 중단되면서 로깡이 있는 선동역사(驛舍) 부근도 로깡을 설치하고 매립하는 과정에서 일부만 매립하고 공사를 중단했어요. 그래서 당시 매립한 부분은 로깡이 흙에 묻혀 있고, 매립하지 못한 부분은 로깡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지요. 로깡을 설치하고 58년이 지나다 보니 흙으로 덮은 로깡도 일부 부분이 보이는 곳도 있어요. 지금도 로깡이 있는 일대는 철도 부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로깡이 철거되지 않은 것은 지금도 우천 시 로깡이 배수로의 역할을 하고 있고, 일부 철도부지로 남아 있으며, 철거 비용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정ㅇㅇ(남성, 1948년생)}
□ 선동역 외에 선도리 부근에 로깡이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로깡은 선동역이 들어설 장소 외에도 용지터널에서 나와 용지에서 선동으로 가는 철도 노반이 지나는 곳은 논이기 때문에 배수로가 설치되어야 했어요. 기억으로 적어도 4곳 이상 배수로에 로깡이 있었어요. 이 구간은 나중에 경지정리가 이루어질 때 도로와 나란하게 배수로가 설치되면서 로깡이 철도 노반 속에 묻혀서 이제 겉으로 보이지 않아요. {박ㅇㅇ(남성, 1941년생)}
□ 현 위치에 있는 로깡의 상태는 어떠한지요?
배수로 용도로 사용한 로깡은 건설된 지 약 57년 정도 지났어요. 그런데도 현재 배수로 기능을 하고 있어요. 배수로 로깡은 전혀 훼손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유는 철거하지 않아도 농사짓는 데 크게 방해 되지 않고, 여전히 예전이나 지금이나 배수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100여 개 이상이 되는 로깡의 철거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도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봐요.
※ 조사자의 의견
비인공업지구조성사업과 비인선철도기공식은 1966년 4월 29일 오후 2 시 30분 서면 도둔리 서도국민학교 교정에서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 전예 용 건설부 장관과 지방 유지 및 주민 다수가 모여 거행되었다.
서천역에서 비인공업지구가 건설될 예정이었던 서면 마량리 비인역까지 노선 거리는 22km이었다. 역 구간별로 보면 서천역에서 종천역까지 7.7km, 종천역에서 선동역까지 7.1km, 선동역에서 비인역까지 7.2km였다.
비인선이 지나는 노선은 현재 행정구역으로 서천읍 군사리(구 서천역)->서 천읍 신송리->종천면 장구리->종천면 당정리->종천면 종천리(종천역)->비 인면 다사리->비인면 장포리->비인면 선도리(선동역)->비인면 칠지리(추 정)->서면 월호리(추정)->서면 신합리(추정)->서면 도둔리(비인역)였다.
비인선은 비인공업지구의 화물 수송을 목적으로 부설하려던 철도였다. 주 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비인선은 1966년 4월 29일 착공하였으나, 울산 공 단에 밀려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1969년 공단 건설이 취소되면서 그 무 렵에 최종 무산되었다. 라고 알고 있다.
1969년 철도연감에 의하면, “비인선은 서천~비인 간 22km로 비인 임해공 업단지의 건설에 따라 장항선 서천역에서 분기하여 비인에 이르는 22km 의 산업철도로 1966년 4월 29일 착공하여 1968년 말 현재 전 공정의 11.5%가 진척되었으며, 지속 사업으로 1973년도에 완공 계획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비인선과 관련된 역은 서천역(舒川驛), 종천역(鍾川驛), 선동역(船東驛), 비 인역(庇仁驛)의 4개이고, 3개의 역이 건설될 예정이었다. 역 부지의 위치는 서천역은 구 서천역이 있던 위치이고, 종천역은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토 대로 서천역에서 7.7km 거리에 있는 현재 구도로와 신도로가 갈라지는 지 점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동역은 종천역에서 7.1km 거리에 있는 선도리 선동마을로 추정되며, 비인역은 선동역에서 7.2km 거리에 있는 비인공업지구가 들어설 서면 도둔리로 추정된다.
비인선 철도의 궤간은 1,435mm인 표준궤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철도 공사는 철도건설국에서 지명경쟁입찰로 비인선 1공구(서천~종천)는 삼양공무, 2공구(종천~비인)는 삼부토건에서 맡아 공사를 하였다.
비인선 구간의 철도 노반 흔적은 현재 하부 노반, 배수관, 교각, 터널 등으로 남아 있다.
향후 조사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비인선의 역사가 제대로 복원되기를 바란다.
[ 참고 문헌 ]
철도건설국, 철도건설사, 서울:교진사, 1969.
교통백서, 교통부, 1967.
매일경제, 제3면, 1966년 4월 29일.
대한 뉴스 제569호-건설의 메아리, 1966.5.7.
사진
<그림1> 비인면 선도리 행정구역
※ 출처 : 네이버 지도
<그림2> 비인면 선도리 마을
※ 출처 : 서천군행정지도(2022)
<사진1> 비인면 선도리 선동역(추정)
※ 긴 타원의 적색 선 안쪽이 선동역임(추정)
※ 출처 : 서천군지속가능지역재단, 드론 사진, 21년 5월 촬영
<그림3> 비인면 선도리 선동역 지적편집도상 위치(추정)
※ 긴 타원의 적색 선 부분이 선동역임(추정)
※ 네이버 지도 활용
<그림4> 선동역 선정 전 지형도(1910~1930년대)
※ 출처 : 국가공간정보포털
<그림5> 선동역 선정 후 지형도(1960년대)
※ 출처 : 국가공간정보포털
<그림6> 비인공업지구조성사업 및 비인선철도기공식(대한뉴스)
<그림7> 비인공업지구 조성사업계획 위치도(대한뉴스)
<사진2> 선동역(추정) 내 로깡 배수로(원경)
<사진3> 선동역(추정) 내 로깡 배수로(근경)
<사진4> 선동역(추정) 내 로깡 배수로(위)
기록개요
생산자료
수집 자료 : 그림 4점
생산 자료 : 그림 3점, 사진 5장
박ㅇㅇ(남성, 1941년생), 임ㅇㅇ(남성, 1944년생), 정ㅇㅇ(남, 1948년생), 신ㅇㅇ(남성, 1956년생), 김ㅇㅇ(남성, 1960년생)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 비인면 선도리의 자연마을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요?
비인면 선도리의 자연마을은 솔머리[송두, 배들이, 선서], 용수말[선동], 왕마지[용지]로 구성되어 있어요.
□ 비인면 선도리에 용지터널이 건설되기 전 도로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1966년 터널 공사가 있기 전에 장포리와 선도리 사이의 통행은 산길로 다녔어요. 터널이 뚫린 후에는 이곳을 통해 두 지역으로 다닐 수 있었어요.
□ 비인면 선도리와 장포리 사이에 있는 터널의 이름과 그렇게 붙여진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선도리와 장포리 사이에 있는 터널의 이름은 ‘용지터널’이라고 부르지요. 터널의 중간쯤에서 선도리와 장포리의 행정 경계가 지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터널이 두 지역에 걸쳐 통과하지만, 터널 부근에 장포리보다는 선도리 ‘용지[왕마지]’라는 마을이 가까이에 인접해 있고 또한 공사와 관련된 사람들이 숙식을 주로 ‘용지’라는 마을에서 하였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어요. 오늘날 지역 간에 건설 공사로 다리 등을 놓으면 이름을 공모해서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용지터널’은 공모한 이름이 아니라 관계 기관이나 공사 관계자들이 협의하여 지역 명칭의 고유성을 확보하기 위해 부근의 마을 이름을 붙인 것 같아요. {임ㅇㅇ(남성, 1944년생)}
□ 터널의 길이, 위치, 소유 및 내부 시설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용지터널’은 길이가 130m이고, 비인면 선도리와 장포리를 지나고 있어요. 터널은 완공 당시 철도청 소속이었다가 유ㅇㅇ이 매입하여 소유하였고, 다음으로 신ㅇㅇ에게 넘어갔다가 현재는 ㅇㅇ펜션 주인의 소유로 되어 있을 거예요. 내부 시설로는 터널 바닥 중앙에 배수로가 나 있고, 그곳이 들여다보이도록 덮개를 덮고 있어요. 또한 기차가 들어오는 경우 사람이 터널에 들어가 있을 때 피신할 수 있도록 피난처가 벽에 파여 있어요. {신ㅇㅇ( 남성, 1956년생)}
□ 터널이 완공된 후 어떻게 활용되었나요?
터널 완공 후, 비인공업지구 조성 취소로 기차는 통행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우회도로가 건설되기 전까지 사람, 우마차, 자동차, 트럭 등이 다녔어요. 특히 군용 트럭이 많이 다닌 기억이 나요. 나중에 우회 도로가 건설된 후 사용 빈도가 줄어들면서 터널은 방치되었어요. 터널이 주요 도로로 사용되지 못한 이유로 터널 안쪽은 기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단선 노폭으로 좁아서 트럭 두 대가 교행하기 어려워 그 대안으로 우회도로가 건설된 것이지요.
처음 우회도로는 바다 가까이로 지나는 해안도로를 건설하려고 하였지만, 예정 노선에서 일부 지주의 반대로 도로 건설이 무산되었어요. 결국 기존 철도 노반 구간을 활용하는 방안이 검토되었고, 터널 옆을 통과하는 도로가 건설된 것이지요.
터널이 방치되고 있는 상황에서 활용 방안으로 젓갈 저장이나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실행되지는 못했어요. 한때 터널 활용으로 지역의 고구마와 생강을 매입하여 터널에 저장하였지만, 습기가 많아 포기했다고 들었어요. 내 기억으로 2021년에 썩은 고구마가 터널 밖에 버려진 것을 본 적이 있어요. 2023년 현재는 터널을 사용하지 않고 있어요.
지금이라도 마을에서 적절한 용도로 활용하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젊은 사람들이 타지에 나가 살고 있고, 농촌에는 노인들만 남게 되어 논의 대상이 되지 못해 안타까워요. {임ㅇㅇ(남성, 1944년생)}
□ 터널과 관련하여 남아 있는 기억은 무엇이 있나요?
터널과 관련하여 잊지 못한 기억이나 추억은 많지 않지만, 터널 건설 당시 비인공업지구 건설로 인한 지역 발전에 큰 기대를 했었어요. 터널을 볼 때마다 비인공업지구가 들어왔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공사할 때 ‘용지터널’은 비인공업지구에 들어갈 화물을 나르는 철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당시 터널 건설의 찬반을 물어주었다면, 발전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당연히 찬성했을 거예요. 공단이 지역에 건설되면 지역민들은 혜택이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지역민들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다른 기억도 있어요. 어릴 때 철도 공사 중 임시로 뚫어 놓은 작은 구멍을 친구들이 기어서 통과하는 위험한 장난을 하면서 굴에서 놀은 기억도 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위험했던 장난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부들이 작업을 마치고 귀가하면, 친구들이랑 터널에서 나오는 흙을 실어 나르는 구루마[수레]를 몰래 타고 놀았던 기억이 있어요. 또 터널 안에 100m 거리가 되는 곳에 금[선]을 긋고 달리기 시합을 했던 기억이 있어요. {신ㅇㅇ( 남성, 1956년생), 김ㅇㅇ(남성, 1960년생)}
□ 터널이 건설된 이유와 터널 및 노반공사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1966년부터 비인공업지구가 서면 도둔리에 건설될 계획이었어요. 1966년 4월 29일에 비인공업지구조성사업과 비인선철도기공식이 서면 서도국민학교에서 개최되었어요. 지역 주민들은 철도 기공식이 실제로 열렸고, 당연히 터널이 건설되면 화물을 실은 기차가 다닌다고 생각했어요.
터널 공사 중 선도리와 장포리에서 철도 노반공사가 동시에 이루어졌어요. 이유는 터널을 뚫으면서 나오는 석비레[마사토] 흙을 철도 노반 둑을 쌓아야 했기 때문이에요. 굴에서 발생한 석비레는 인부들이 구루마[수레]에 실어서 운반하여 철도 노반이 조금씩 진척되었지요. 하루 작업량은 정해져 있었어요.
현재 선도리 쪽 도로의 높이는 과거 철도 노반 건설 때보다 약 1.5m 정도 낮아진 상태이고, 철도 노반을 낮출 때 나온 흙으로 바다 가까이 해안 길을 건설할 때 사용했어요. {신ㅇㅇ( 남성, 1956년생)}
□ 터널을 만들 때 공사 현장에 참여하여 일한 경험과 당시 상황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터널 공사는 1966년에 시작하여 5~6년 정도 걸렸어요. 나는 22살 때 공사 일에 참여했어요. 제2공구 구간 시공사는 삼부토건이었어요. 터널 공사는 중단 없이 한 번에 완공하였어요. 터널 안에 철도의 선로가 깔리지 않았을 뿐이지 터널은 정상적으로 완성되었어요. 터널 작업은 터널 안 양쪽에 지지대를 세우고 천정에 있는 흙이나 돌을 제거할 때는 답구다(판 모양으로 생긴 밀어서 넣고 뺄 수 있는 장치)를 앞으로 당겨 레일 위에 있는 구루마[수레]에 흙이나 돌이 채워지면 그것을 터널 밖으로 배출했어요.
터널은 비인면 선도리와 장포리 양쪽에서 각각 산을 뚫은 작업을 했어요.
터널은 뚫을 때 3점을 찍고 그 점들을 이어 앞에 새로 생기는 점을 다부라고 하는데 이런 방법으로 반복해서 다부를 찍어가면서 양쪽에서 굴을 뜷고 들어가면 결국 터널은 마주치게 되지요. 노미[끌, 정]라는 연장으로 굴을 뚫은 부위에 대고 망치로 두들겨 가로와 세로로 1m 정도 파낸 후 폭약을 막장에 설치하고 심지에 불을 붙여 발파해서 굴을 뚫고 들어갔어요.
굴 뜨는 노미[끌, 정]를 만드는 대장간을 “세오야끼”라고 불렀어요. 이런 방식으로 터널을 뚫고 들어갔지요. 터널 공사는 먼저 터널 벽에 콘크리트를 치고, 다음으로 아치형인 천정에 콘크리트를 치는 것을 ‘가시오’라고 말해요.
천정에 판자를 깐 다음에 자갈과 모래를 시멘트에 섞어 삽으로 비벼 만든 콘크리트를 타설하여 만들었어요. 당시 공사 현장에서 콘크리트를 타설한다는 말을 “공구리 친다”라고 했어요.
천정의 두께는 60전[60cm] 정도 될 거예요. 콘크리트 작업은 남자와 여자가 분담하여 일했는데, 여자들은 모래와 자갈을 머리에 이어 날라주었고, 남자들은 그것을 삽으로 비벼 콘크리트를 만들었어요.
당일 일을 하면 하루 단위로 노임을 전표로 끊어 주었어요. 전표에는 몇 공구인지 표시와 금액 등이 적혀 있었고, 인부들은 돈이 급하게 필요할 때 전표를 돈 대신 사용했어요. 거의 한 번에 간조(임금 정산)를 했던 기억이 나요.
당시 터널 공사는 제1, 2공구 구간으로 나누었는데, 터널을 중심으로 선도리 구간과 장포리 구간은 모두 제2공구 구간에 속했어요. 제1공구는 서천역에서 종천 부근 9km까지이고, 제2공구 구간은 종천 9km부터 서면 도둔 22km까지였어요.
터널 공사는 선도리와 장포리 양쪽에서 했어요. 나는 선도리 쪽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반대쪽인 장포리 공사 상황은 알 수 없었어요. 선도리 쪽에서 일한 인부는 약 60~70명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터널 공사에 일하러 온 사람은 거의 서천 관내 사람이고, 선도리에서 온 사람은 10여 명으로 알고 있어요. 전라도 광주, 경남 하동에서 온 사람도 있었어요. 아마도 타 지역 인부는 소장과 함께 다니던 사람으로 알고 있어요.
공사 감독은 공구마다 1명의 공구장이 전체를 감독하고, 그 아래에 십장이 공사 현장을 감독하고, 사무장이 행정 업무를 처리했어요. {임ㅇㅇ(남성, 1944년생)}
□ 터널이 건설되면서 선도리 주변 땅의 지가 변동이 있었나요?
당시 터널 공사가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땅 투기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하지만 비인공업지구가 들어설 서면에는 땅 투기의 붐이 있어서 서울 등 외지인들이 땅을 많이 매입하였다고 들었어요.{임ㅇㅇ(남성, 1944년생)}
※ 조사자의 의견
비인공업지구조성사업과 비인선철도기공식은 1966년 4월 29일 오후 2 시 30분 서면 도둔리 서도국민학교 교정에서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 전예 용 건설부 장관과 지방 유지 및 주민 다수가 모여 거행되었다.
서천역에서 비인공업지구가 건설될 예정이었던 서면 마량리 비인역까지 노선 거리는 22km이었다. 역 구간별로 보면 서천역에서 종천역까지 7.7km, 종천역에서 선동역까지 7.1km, 선동역에서 비인역까지 7.2km였다.
비인선이 지나는 노선은 현재 행정구역으로 서천읍 군사리(구 서천역)->서 천읍 신송리->종천면 장구리->종천면 당정리->종천면 종천리(종천역)->비 인면 다사리->비인면 장포리->비인면 선도리(선동역)->비인면 칠지리(추 정)->서면 월호리(추정)->서면 신합리(추정)->서면 도둔리(비인역)였다.
비인선은 비인공업지구의 화물 수송을 목적으로 부설하려던 철도였다. 주 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비인선은 1966년 4월 29일 착공하였으나, 울산 공 단에 밀려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1969년 공단 건설이 취소되면서 그 무 렵에 최종 무산되었다. 라고 알고 있다.
1969년 철도연감에 의하면, “비인선은 서천~비인 간 22km로 비인 임해공 업단지의 건설에 따라 장항선 서천역에서 분기하여 비인에 이르는 22km 의 산업철도로 1966년 4월 29일 착공하여 1968년 말 현재 전 공정의 11.5%가 진척되었으며, 지속 사업으로 1973년도에 완공 계획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비인선과 관련된 역은 서천역(舒川驛), 종천역(鍾川驛), 선동역(船東驛), 비 인역(庇仁驛)의 4개이고, 3개의 역이 건설될 예정이었다. 역 부지의 위치는 서천역은 구 서천역이 있던 위치이고, 종천역은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토 대로 서천역에서 7.7km 거리에 있는 현재 구도로와 신도로가 갈라지는 지 점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동역은 종천역에서 7.1km 거리에 있는 선도리 선동마을로 추정되며, 비인역은 선동역에서 7.2km 거리에 있는 비인공업 지구가 들어설 서면 도둔리로 추정된다.
비인선 철도의 궤간은 1,435mm인 표준궤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철도 공사는 철도건설국에서 지명경쟁입찰로 비인선 1공구(서천~종천)는 삼양공무, 2공구(종천~비인)는 삼부토건에서 맡아 공사를 하였다.
비인선 구간의 철도 노반 흔적은 현재 하부 노반, 배수관, 교각, 터널 등으 로 남아 있다.
향후 조사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비인선의 역사가 제대로 복원되기를 바란다.
[ 참고 문헌 ]
철도건설국, 철도건설사, 서울:교진사, 1969.
교통백서, 교통부, 1967.
매일경제, 제3면, 1966년 4월 29일.
대한 뉴스 제569호-건설의 메아리, 1966.5.7.
사진
<그림1> 비인면 선도리 행정구역
※ 출처 : 네이버 지도
<그림2> 비인면 선도리 마을
※ 출처 : 서천군행정지도(2022)
<그림3> 비인면 선도리(1910~1930년대)
※ 출처 : 국가공간정보포털
<그림4> 비인면 선도리 마을(1960년대 지형도)
※ 출처 : 국가공간정보포털 / 자연마을 : 선서, 선동, 용지 마을임
<그림5> 비인면 선도리, 장포리 간 용지터널
※ 긴 타원의 흰 선 부분이 용지터널임
<그림6> 비인공업지구조성사업 및 비인선철도기공식(대한뉴스)
<그림7> 비인공업지구 조성사업계획 위치도(대한뉴스)
<사진1> 용지터널(선도리 부근)
※ 출처 : 동아일보, 1974.3.16.일자 7면
<사진2> 용지터널(선도리 부근)
※ 2023년 9월 촬영
<사진3> 용지터널(장포리 부근)
※ 2023년 9월 촬영
기록개요
생산자료
생산 자료 : 그림 1점, 사진 2장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 골독재를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골독재는 비인면 성내리와 관리 사이에 있는 재를 지칭하는 이름이에요. 두 지역에서 양쪽을 오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해요. 나는 성산에 살았지만, 친구들과 같이 학교 끝나면 골독재에 가서 골독[곱돌]을 주었던 기억이 나요. {신ㅇㅇ(남성, 1960년생)}
※ 조사자의 의견
이 재에 실제로 골독[곱돌]이 많이 있다. 재는 길이 나 있는 고개를 말하 는데, ‘골독재’라는 지명은 ‘골독’이라는 말과 ‘재’라는 말이 결합한 것이다.
‘골독’은 ‘곱돌’이라고도 하지만, 이곳 재는 곱돌재라고 하지 않고 ‘골독재’ 라고 부르고 있다. 조사자도 ‘골독재’를 어릴 때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지명이다.
□ 골독재에 가 본 적이 있으신가요?
국민학교 때에 친구들과 함께 골독을 줍기 위해 가 본 적이 있어요. 옛날 도로는 골독재 마루를 기준으로 성내리로 내려가는 구간과 관리로 내려가 는 구간 두 곳에 곡선 도로가 있었어요. 당시 골독재는 지금과 다른 도로 형태를 하고 있었지요. 지금도 골독재 일부 구간에 약간 곡선 도로가 있긴 하지만, 과거와 달리 곡선 구간을 직선형 도로로 바꾸었어요. 곡선 구간 도로 직선화 작업은 1975년 무렵에 이루어진 것으로 기억나요.
옛 도로는 비인면 성내4리 교촌을 지나 현재 도로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한 채의 슬라브 민가가 있는데 그 민가 뒤쪽을 지나 시계방향으로 진행하여 산에 있는 곡선 도로를 돌아 약간의 경사진 도로를 오르면 골독재 마 루에서 현재 도로와 합쳐져요. 과거에는 도로에서 나온 돌을 모아 도로가 에 띄엄띄엄 돌무더기를 쌓아 놓았던 모습이 생각나요. 돌무더기에는 골독 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재[고개] 마루에서 관리 방향으로 도로를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에 밭이 있고 가운데에 집이 한 채 있어요. 그 집 주변 둘레에 있는 산에 인접하여 활처럼 휘어진 도로가 나 있는데 이 도로가 옛 도로예요. {신ㅇㅇ(남성, 1952년생)}
□ 주워 온 골독은 어떻게 사용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비인면 성내4리에서 골독재 마루로 올라가는 현재의 도로가 과거의 소로였어요. 골독은 이 소로를 따라 올라가 다다르는 골독재 마루에서 친구들과 같이 주웠어요. 친구들과 골독재에서 주워 온 골독은 팔방놀이, 오징어놀이 등을 할 때 땅에 팔방이나 오징어 모양을 그릴 때 사용했어요. 마치 흑판에 선생님이 백묵으로 글씨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골독으로 땅에 그으면 하얗게 줄이 생겼어요. 주로 골독으로 땅에 금[선]을 그을 때 사용했어요. 다른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았어요. {신ㅇㅇ(남성, 1952년생)}
□ 골독재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으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우천으로 인하여 신작로 노면에 돌이 불규칙하게 밖으로 돌출되어 있으면 자동차 운행 시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땅 깎는 차’가 종종 평탄화 작업을 했어요. 그 차가 골독재를 지나가면 신기하여 몇 명의 친구들과 같이 차 뒤를 따라 쫓아갔던 기억이 생생해요. {신ㅇㅇ(남성, 1952년생)}
※ 조사자의 의견
옛날에는 산짐승인 곰이 많이 살던 재[고개]였고, 성내리에서 서천 쪽으로 가는 대략 800m 지점에 성황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 이 고을의 원님이 귀한 물건을 좋아해서 고을 사람들이 여러 가지 물건을 받쳤다. 그때 한 농부가 원님께 바칠 것이 없어서 이 산에서 나오는 곱돌을 캐서 깎아가지고 가자 도로 갖다 버리라고 해서 이 고개에 다시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골독이 골독재 있다는 정보는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언제부터인가 골독재라 불렸던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면서 구전(口傳)으로 자연스럽게 전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부모님을 포함하여 동네 어르신들이나 선배들부터 들었던 기억이 나요.
또한 제가 알고 있는 골독재를 후배들에게 자연스럽게 알려주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여전히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골독재라는 지명이 전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신ㅇㅇ(남성, 1960년생)}
※ 조사자의 의견
<골독재에서 관리 가는 옛길과 골독[곱돌]을 찾아서>
답사 연월일시 : 2022년 11월 24일 15:30~
나의 어머니 고향이 비인면 관리 ‘안이굴’이고, 그곳을 가려면 ‘골독재’를 지나야 한다. 지금도 ‘골독재’에서 관리 ‘안이굴’ 들어가는 옛길이 남아 있다. 옛길은 시골집에 갔을 때 어머니께 상세히 여쭈어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비인 성내리에서 2022년 11월 24일 오후 3시 30분경에 출발하여 어머니가 말씀해 주신 옛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나의 머릿속에 옛길과 함께 ‘골독[곱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11월이라 길 주변에 참나무 낙엽이 떨어져 길에 수북이 쌓여 있어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낙엽을 밟고 ‘골독재’에서 찾은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골독재’ 입구에서 50m 정도 걸어갔을 때 낙엽에 덮인 길 가운데에 회색을 띠는 무엇인가 반짝이듯 눈에 띄었다. 발로 낙엽을 헤쳐 보았다. 앗! 직관적으로 곱돌일 거라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니 ‘골독’이었다.
사람들이 오래도록 걸었던 길이기에 곱돌(<사진 6>) 겉면이 반질반질 닳아 윤이 나고 있었다. 나는 발견의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을 떼지 못 했다. 아! 곱돌[골독]이다. 그래서 ‘골독재라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번득 들었다. 나는 그 ‘골독’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혹시 주변에 더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고, 나뭇가지로 낙엽을 치우니 그 주위에 여러 개의 다른 곱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 옛길 답사를 통해 골독을 발견하고 ‘골독재’라는 지명을 확인하는 결과를 얻었다.
사진
<그림1> 비인면 성내리와 관리 간의 골독재(위성지도)
※ 적색 선 타원 부근이 골독재임
※ 네이버 지도 활용
<그림2> 비인면 성내리와 관리 간의 골독재(지형지도)
※ 적색 선 타원 부근이 골독재임
※ 네이버 지도 활용
<그림3> 골독재와 도로(1910~1930년대)
※ 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그림4> 골독재와 도로(1960년대)
※ 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그림5> 골독재와 도로(1970년대)
※ 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그림6> 골독재와 도로(1980년대)
※ 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그림7> 골독재와 도로(1990년대)
※ 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그림8> 골독재와 도로(2000년대)
※ 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그림9> 골독재와 도로(2011년)
※ 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그림10> 골독재와 도로(2015년)
※ 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사진1> 골독재(비인면 성내리 방향)
<사진2> 골독재(비인면 관리 방향)
<사진3> 골독재(관리 가는 소로)
※ 표지판 왼쪽이 소로 입구임
<사진4> 골독재 옛날 도로 입구(성내리)
※ 표지판이 서 있는 곳이 입구임
<사진5> 골독재 옛날 도로(관리)
※ 전봇대 왼쪽으로 보이는 도로
기록개요
생산자료
생산 자료 : 그림 2점, 사진 6장
김ㅇㅇ(여성, 1937년생), 신ㅇㅇ(남성, 1952년생), 문ㅇㅇ(남성, 1968년생), 신ㅇㅇ(남성, 1960년생)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어린 시절
제보자 양희범은 1939년 산골 마을 구동리에서 삼형제 중 둘째로 출생했으나, 어려서 딸만 있는 작은아버지 집에서 양자로 자랐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경찰관이었고, 산도 있고 논도 한 열 마지기 있어 살기 괜찮았다고 한다. 불행히도 11세(국민학교 4학년) 때 6.25사변이 일어나 친부와 양부가 다 학살당해 집안이 어려워져 어린 시절 고생을 많이 하며 지냈다.
“내가 여기서 초등학교 밖에 안 나왔어유. 그래서 배우도 못하고 그냥 고생한 거유. 그렇지 안했으믄사 다만 중핵교라고 댕겼을지도 몰라요. 그저 국민핵교 바듯이 졸업해가지고서.“
잠시 서울로 ⦁⦁⦁ 해외로
고향에서 농사짓고 살다 1970년(30세)에 아내 송순덕(22세)과 결혼하고, 몇 개월 안 돼 서울로 나가 건설회사 철근 일을 했다. 이때 일이 많지 않아 살림이 어려웠다.
“그때만 해도 건설 붐이 없어가지고서 일이 한 달에 많이 허야 15일, 20일 못 했어유.”
그러다 중동 건설 붐이 일 때,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미륭건설에서 5년 동안 철근 일하며 힘들었어도 얼마간 돈을 벌게 되었다.
“77년 11월달인가 갔거든요. 그때만 해도 여기서 있는 것 보담은 나섯죠. 많이 벌었을 때는 쌀 20가마니 값도 받고 한 달에 그렇게 벌었죠.”
“사우디에서 일할 때 많이 힘들었죠. 암만해도 타국이고 날씨도 더웁고.”
1982년 귀국하여 서울에서 다시 철근 일을 하다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마음먹는다.
“겨울 같은 때는 일이 없고. 그러면 시골 가서나 그냥 농사지으면 맘이 젤 편코 그러것다 생각하고, 집이 식구 놓아 두고서나 내가 내려와 버렸어요.”
고향에 돌아와서
1984년 고향에 돌아와 그동안 번 돈으로 논(3000평)과 밭(1000평)을 사서 벼농사와 고추, 마늘, 양파, 생강,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고추는 5000포기 정도 심었고, 소도 대여섯 마리 키웠다. 그때 농사 수익이 괜찮았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쌀값이 괜찮았어요. 그때만 해도 쌀 한 말 갖다 먹으면 3일 4일 남의 집 일 해줘야 했어요.”
구동리 땅값이 다른 지역에 비해 비쌌는데 이유가 있었다.
“여기가 땅 금이 많이 비쌌어유. 나 여기서 논 살 때, 논 한 280평인가 되는데, 논이 7배민가 8배민가 되는데, 그것을 포크레인 대가지고서나 한 배미로 만들고 했는데, 저 화양뜰 그런 데보다 여기가 더 비쌌어요. 여기는 수랑논이라고 물이 계속 나오니까.”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여긴(서천) 뭐 지금은 도시가 되버렸는데, 하늘서 비오기만 기다렸지 농사를 못 졌어요. 물이 없어서. 계속 가물고 그러니까 모도 못 심고. 여기는 수랑논[수렁논]이라 그래도 물이 있어서 식량은 했죠.”
요즘 대부분 농가는 트랙터로 농사를 짓는데, 아내와 둘이 예전에 쓰던 경운기 관리기로 농사를 짓는다. 일손이 항상 부족하다.
“토지가 넓지도 않고 새로 장만하려면 돈도 많이 들어서. 그래도 일손이 바쁠 때는 객지에 나가 있는 아들이 와서 많이 도와준다.”
생산한 농산물은 주로 서울에 있는 친척이나 지인들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판매하고 남는 것은 장에 가서 판다.
“생강, 마늘, 고추 같은 건 서울 친척이나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팔아요. 그 사람들이 딴 사람 인자 연방 거시기 해주먼 여기서 택배루다 보내주고 그러지.”
“젊었을 때는 무서운 줄 모르고 오토바이 125CC에 가마니로 짐을 싣고 아내를 태우고 부여장, 은산장, 외산장에 가서 팔었유. 또 서천장 허구요. 갈[가을] 같은 때, 장항장 한산장도 갈 때 있고 그래요. 나머지 장은 한나절 장예요. 서천은 저녁때까지 서는데, 나머지 장은 한나절 서면 사람 몇 사람 안 나와요. 판교장도 스기는[서기는] 스는데[서는데] 사람 몇 사람 안 나와요.”
2008년부터 논 3000평 중 1500평은 농어촌공사에 5년 치 임대료를 한 번에 받고 위탁 임대하고, 나머지 논 1500평, 밭 1000평에 고추 마늘 양파 농사를 짓고 있다.
소회
제보자는 사람들이 다 외지로 도시로 떠나도 고향에 머물러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걸 가끔 후회하기도 한다.
“집이 식구는 절대 안 올라고 그랬는데, 내가 억지로 내려왔거든요. 그래서 집이 식구는 불만이 많아요. 지금까지 고생만 하고 그런 게. 집이 식구 말 들었으면 고생을 좀 들했을 텐데, 그때만 해도 서울서 어지간한 것은 한 5년 정도 해가지고서나 집 한 채는 그냥 거시기할 수 있었거든요. 거기서 집 한 채만 가지고 있어도 그냥 그랬는데, 인제 힘이 부쳐서 못 짓겄어.”
사진
<사진1> 마을회관에서 양희범
<사진2> 다랑논을 경지 정리한 현재의 논
<사진3> 다랑논을 경지 정리한 현재의 논
<사진4> 집 옆에 있는 고추밭
<사진5> 집 마당에 고추 말리는 장면
<사진6> 소 먹이던 구유
<사진7> 밭농사에 쓰는 농기구들
<사진8> 관리기
<사진9> 관리기
<사진10> 경운기, 논에 약주려고 준비 중
<사진11> 도정기
기록개요
생산자료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 독립운동을 하신 조부의 인적 사항은 어떻게 되나요?
김(金) 인(印)자 두(斗)자이시고, 1897년 11월 25일에 전북 익산군 이리읍 신석리에서 출생하셨고, 1946년 7월 12일에 돌아가셨어요.
□ 독립운동의 동기는 무엇인가요?
애국운동을 하던 조부의 외종숙 김인전 목사님과 뜻을 함께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셨어요. 조부는 김인전 목사님의 한영학교 제자로 그분의 투철 한 나라 사랑의 정신과 민족사상의 영향을 받으셨어요. 김인전 목사님은 증조부의 한 살 위 재종 처남이셨고, 영명학교 교사인 증조부를 잘 알고 계셨어요.
□ 독립운동은 언제 하셨나요?
1919년 이전부터 시작하셨으며, 1919년 3월 29일 마산면 신장리 장날에 만세운동을 하셨어요.
□ 독립운동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1919년 3월 29일 마산면 신장리 장날에 송여직·송기면 형제 지사분들 외 여러 다른 지사분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셨어요. 이분들은 대부분 김인전 목사에게서 민족교육을 받은 한영학교 제자들이었어요. 지사분들은 늘 나라를 위해 걱정하며 국권회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심하셨죠. 그러던 중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이 공포되고, 군산에서도 3월 5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사들은 3월 29일 신장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셨죠. 조부의 저항운동은 수감생활 후에도 계속되었어요.
□ 독립운동 내용은 무엇인가요?
조부는 1914년 18세 때 영명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금산군 소재 금산보 통학교에 교직 발령을 받아 재직 중이셨어요. 1919년 당시 23세였던 조부 는 1919년 3월 29일 마산면 신장리 장날에 아주 극렬하게 만세 시위를 주도하셨어요. 조부는 동지들과 몇 날을 함께 밤새워 가며 태극기를 제작하 셨지요. 거사 당일에는 장에 나온 2000여 명의 군중들에게 준비한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도록 독려하셨어요. 당시 경찰들은 총으로 발포까지 하며 시위대에게 부상을 입혔어요. 이런 와중에 송기면 등 6명이 일경에 의해 강제 연행되자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조부 등 다른 지 사들이 시위대와 함께 경찰출장소를 습격하여 창문, 벽, 기물을 완파하는 등 강력한 시위를 벌여 그들을 구출하셨어요. 당시 출장소는 기둥과 지붕 만 남았다고 해요.
그 후 조부는 동지들과 시위자들과 함께 서천경찰서를 향해 진격하다가 모세다리 근처에서 사태 파악을 위해 말을 타고 오는 서천군수 권익채와 조우했을 때, 그가 3.1 만세운동 해산을 권고하자, 조부는 군수에게 태극기를 주며 당신도 조선 사람이니 말에서 내려 만세를 부르라고 호통을 치셨어요.
결국 주동자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조부도 압록강 검문소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공주감옥에 수감되셨어요. 전주와 군산의 삼일운동 배후였던 조부의 외종숙 김인전 목사는 조부와 자신의 작은 아버지(김영배 선생)께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에 있는 한영학교 운영을 당부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4월 초 상해로 망명하셨어요. 김인전 목사는 임시정부에서 여러 요직을 거쳐 마지막에는 임 시정부의정원 의장까지 지내셨죠. 김인전 목사가 떠나신 후 조부도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 망명길에 올랐으나 압록강 대교 검문소에서 일제 헌병의 저지를 받아 강제 귀가 조치를 당하셨어요. 법원의 재판 절차를 위한 조치였죠. 수형기록 카드에 다른 사람들과 달리 “소요죄” 외에 “도주” 죄가 첨가된 것은 이 사건 때문인 것 같아요.
그 후 조부는 일경에 넘겨져 공주지방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판결받고 공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셨어요. 출옥 후에도 조부는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어요. 조부는 금당교회에서 열린 전라도회 군산서북지방 서동교회(舒東敎會. 서천 동부지역 교회) 소제직회에서 구동 교회의 청원과 제직회의 의결로 구동교회의 “단독조사”(單獨助事)가 되셨어요. 당시 구동교회는 부설로 일광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조부는 이 학교의 교사로도 활동하셨어요. 이 학교는 구동학교라고도 불렸죠. 일광학교는 성인교육에도 힘썼는데 교사들과 학생들은 일제에 극렬히 저항했어요. 이때 조부는 앞장서셨고, 일경은 경찰서로 연행하여 고문을 반복하였다고 해요. 가족들은 늘 불안에 떨었다고 해요. 조부는 심한 고문으로 거의 폐인이 되시고 말았어요.
□ 독립운동 장소는 어디입니까?
서천군 마산면 안당리 127번지 일대, 한영학교, 구동교회, 서천출장소 일대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셨어요.
□ 독립운동을 함께 한 사람이 있습니까?
조부는 송여직, 송기면, 유성렬, 고시상, 양재흥, 박재엽, 나상준, 이동홍, 정 일창, 이승달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어요. 송여직 지사는 조부의 둘째 여동생의 시아버지이시므로 인척 관계이죠.
□ 독립운동을 하면서 겪은 고초가 있습니까?
조부는 1919년 3월 29일 신장리만세운동을 주도한 일로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언도 받고 1919년 5월 19일부터 수형생활을 시작하셨어요. 수감 중 각종 모진 고문들을 당하셨죠. 출옥 후에도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 하셨는데 일본 형사들에 의해 아홉 번이나 서천경찰서로 연행되어 거꾸로 매달려 고춧가루 물주전자 고문과 최후에는 전기고문까지 당하셨어요.
□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어떤 기록이 남아있습니까?
조부에 관한 독립운동 기록은 「판결문(대전8년형공제131호)」(공주지방법 원, 1919.5.19.)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3권(국가보훈처, 1987 년) 기록이 남아있어요.
□ 독립운동에 대한 정부의 보훈이 있는지요?
정부는 조부의 건국 공훈을 인정하여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서훈번호 19-000597)을 추서하였어요. 재정지원과 관련해서는 부친이 살아계실 때는 일정 금액 생활보조비를 받으셨는데 손자 대부터는 없었어요. 1945년 8월 15일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별세하신 경우에는 손자 대에도 적용이 되고 그 이후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 묘소는 어느 곳에 있습니까?
묘소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333-1에 있는 선영에 모셔져 있어요.
□ 후손으로 조부의 독립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시 개인이나 가정에 극심한 고통을 주었던 독립운동이었지만,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나라의 국권 회복에 기여한 측면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3.1독립운동은 임시정부 수립의 원동력이 되었고 다양한 형태의 민족운동의 발원지가 된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보아요. 3.1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어야 하고, 후손들에게 전승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독립운동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우리나라가 건재한 것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희생한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나라 사랑의 정신과 실천의 산물이라고 생각해요. 나라가 있어야 나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애국 선혈들처럼 내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충실히 감당하고 후손들에게 나라 사랑의 정신을 물려주는 것이 곧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 독립운동의 후손으로 어떤 바람이 있습니까?
일제강점기에 불의하고 무도한 일본에 저항하여 모든 국민이 거국적으로 일어나 국권을 회복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일궈온 것처럼, 나라의 지도자들과 국민이 하나가 되어 냉혹한 국제관계 속에서도 나라를 굳건히 수호하길 바래요. 과거 못지않은 경제성장과 번영을 이루어 세계 모든 나 라에 영감을 주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남북통일도 이룰 수 있기를 바라고, 또 한중일 동아시아 국가들도 과거의 아픈 감정들 을 청산하고 유럽의 나라들처럼 서로 화친한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 독립운동을 하실 때 가정환경은 어떠했습니까?
군산 영명학교 교사이셨던 증조부가 1917년에 별세하셨기 때문에 조부께서는 당신 어머니와 아내, 세 여동생과 함께 남게 되셨지요. 하지만 조부께서는 독립운동 하신다고 가족들은 거의 돌보지 못하셨죠. 더구나 감옥에 가셨을 때는 유족들의 생계가 막막하였고, 출감 후에도 계속 경찰서에 끌려다니실 뿐 아니라 구타, 고춧가루 물고문, 전기고문 등으로 정신장애까지 얻어 집안 살림을 돌볼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가정이 풍비박산이 된 상태였어요.
□ 독립운동을 인정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습니까?
제 부친께서 조부의 독립운동기록을 찾기 위해 처음에는 한영학교, 영명 학교, 금산학교 등을 방문하며 무슨 흔적이라고 찾고자 노력하셨어요. 하나같이 다 불타서 아무것도 남은 것은 없다는 말만 듣고 허탈해하셨으나 결국에는 공주지방법원, 기록보존소에서 당시 기록이 부산으로 이관되었다는 말을 듣고 거기까지 가셔서 찾을 수 있게 되었어요.
□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만나는 모임이 있습니까?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에 있는 광복회세종특별자치시 지부에 참여하고 있어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월 2회 정규모임을 갖고 있죠. 저는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지부에서는 순국선열 및 독립유공자의 희생정신 계승‧승화사업, 독립유공자 후손을 위한 장학사업, 독립운동 사적 발굴 및 보전사업, 독립운동 관련 홍보활동 강화 사업, 광복회원의 권익신장, 복지증진 및 상부상조 사업 등을 하고 있어요.
[ 참고 문헌 ]
서천군, 『서천군지』, 1988.
김철수, 『내 삶의 역정 하늘에서 드리운 손잡고 넘고 또 넘었다』, 2004.
서천군지편찬위원회, 『서천군지』, 2009.
서천군,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서천의 독립운동사, 2020.
사진
<사진1,2,3> 애국지사 김인두 비문(1981년 근찬)
公의諱는印斗이요號는義岩이시며貫은光山이시니新羅神武王第三子金興光公의三七世孫이되시다考諱秋鉉公과金海金氏의長男으로一八九七年丁酉十一月二十五日全北裡里邑新石里에서出生하시였다幼時로부터品性이强直하며節義에透徹하여恒常日帝의侵略과虐政에甚히憤嘆하던나머지一九一九年己未三月서울에서부터우리民族自決로獨立宣言運動이展開되자率先하여이에呼應코저宋箕勉劉性㤠李根浩林學圭宋汝直羅相俊李東洪梁在興朴在燁鄭日彰李承達諸公들과뜻을같이하던中公은朴在燁梁在興公들과上京할計劃이던차同擧事의主動者이신宋箕勉公의傳喝로盧亨耒公이太極旗製作을慫慂해왔으므로公은上京의뜻을바꾸어快히이에同調二八日까지七千枚을完城하였다二九日下午一時부터는馬山面新場里장터에서宋箕勉公의宣言文朗讀에이어劉性㤠李根浩林學圭公의先唱으로大韓獨立萬歲示威에드러가니公은合勢하여高時相梁在興朴在燁公과함께장안의二千餘群衆에게呼應토록啓導하였다이때日警에게宋箕勉劉性㤠李根浩宋汝直羅相俊公以下六人이被逮拘禁되니群衆의絶叫가拘束者救出運動으로熾烈化하였다公은高時相梁在興朴在燁公들과被囚同志를奪回코저群衆의先頭에서指揮하였다日警의銃擊으로李東洪梁在興公이負傷하였으나同志救出에成功하였다이어舒川을向하여示威하며韓山境內함배기에이르렀을때急遽出動하여侍衛隊列에겨냥하는日帝憲兵隊앞에나타난權益采郡守에게公은强勸하여萬歲를부르도록하였다力不足解散後에公은被逮되어三年言渡를받고公州獄에서一年六月을服役後艱辛히出獄한後華陽私立學校敎職에계시어學徒들에게獨立思想을鼓吹하니每日같이번갈아엿장수로假裝한日警들에게再三連行되어拷問을當하시고最後로는納稅拒否運動을하시다가極刑을받으신公은一九四五年陰七月十二日解放을보시고舒川郡華陽面南星里妹家에서逝去하시니舒川郡韓山面種芝里山三三一의一番地에子坐로謹封되시다政府에서는公의建國功勞를기리며一九七七年十二月十三日大統領表彰을追叙하다
一九八一年辛酉 八月 日 舒川郡守 朴在勳 謹竪
<글1> 애국지사 김인두 묘비 원문
출처 : 서천읍 종지리 산 331-1 선영 묘비
<사진4> 애국지사 김인두 묘소(상석이 있는 묘소)
<사진5, 6> 김인두 애국지사 관련 내용
※ 서천의 독립운동사, 2020, 서천군,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p.271.
<사진7, 8> 김인두 애국지사 관련 내용
※ 아들 김철수는 자서전에 부친(김인두)의 독립운동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음, p.12-14.
기록개요
후손을 통해서 본 애국지사 김인두의 독립운동에 관하여
생산자료
생산 자료 : 사진 4장, 글 1점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1. 아버님이 대목장(도편수)이셨다면서요?
할아버지부터 목수이셨어요. 할아버지(정규철)께서는 증조할아버지께 한학도 배우셨으나 너무 가난해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목수를 시작하셨어요. 아버님도 16세부터 목수 조수로 따라다니기 시작하였다가 그 뒤 할아버지와 함께 소수서원(紹修書院) 복원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시면서 본격적으로 대목장의 길을 걷게 되셨다고 해요. 아쉬운 것은 할아버지께서 너무 일찍(52세)이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심적으로 많이 힘 드셨을 거라 생각이 들어요. 소수서원 보수공사 때(1953년), 책임자이신 할아버지께서 병환으로 쓰러지셨어요. 그때 아버님은 31세셨는데, 아직 아버님을 믿지 못하는 서원관리소 측을 설득하여 일을 맡았고, 공기를 당겨 잘 마치면서 실력을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셨어요. 그 뒤로 청주 보은에 있는 법주사와 운현궁, 전국의 관아·사찰·사원 등 수 많은 건축물들을 신축·보수·자문하며 일생을 사셨어요.
-1921년생이신 아버님은 1981년 2월에 문화재관리국 지정 문화재 수리기술자 제 1호<문화재기능보유자 제1(101)호>로, 1990년부터는 <무형문화재 제10호 서천대목장>으로 지정되셨어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90세가 넘도록 문화재 복원 및 수리, 서원이나 사찰의 신축·감리 일 등을 하셨어요. 아버님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라도 다니시며 쉬지 않고 하셨어요.
-1982년도에 대목장 분야가 신설돼 아버님이 1세대 보유자가 되셨어요. 그 후 거의 70년을 일하셨으니, 1세대와 2세대 분들 모두와 같은 시대를 아우르며 일을 하셨을 거예요.
일제에 의해 많은 문화재가 훼손되었는데, 1930년대를 지나며 차츰 문화재를 복원하는 사업이 거국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아버님처럼 대목 일을 하시는 분들의 참여 기회가 많아졌다고 들었어요.
2.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말씀해주세요.
-아버님은 7남매를 두셨어요. 제가 장남이며 한때는 아버님을 따라 작업 현장에도 따라다니며 일을 조금 배운 적도 있었어요. 저에게 정직하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살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아버님이 전국을 오가며 현장을 다니시다보니 아래로는 제주도까지도 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다니셨어요. 그러다보니 짧게는 몇 주에서 여러 달씩 집을 비우시곤 해서 어머님을 도와 집안일을 도와야했어요. 아버님이 연로해지신 후에는 현장을 오가실 때 운전을 해드리느라 많은 현장들을 아버님과 함께 돌아볼 수 있었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로는 가까운 서천 이외의 건축물들을 돌아본 적은 없지만, 아직도 아버님과 함께 다녀온 곳들에서의 많은 추억들이 생생합니다. “목수는 먹통에 물이 마르면 안 된다.”라는 말씀 속에 가족들의 생계에 대한 부담도 크셨던 것을 느꼈어요. 내 나이 70이 넘고 보니, 아버님께 아들로서 잘 못하고 뜻을 잘 받들지 못한 것들만 후회로 남아있어요.
3. 할아버님을 따라 아버님이 목수를 시작하시고 대목장이 되셨는데, 아버님 대를 이을 생각은 없으셨나요?
-2009년 9월에 후손들이 아버님의 노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공적비를 세워드렸지만, 그 기쁨보다는 후계에 대해 걱정이 크셨어요. 제가 젊어서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아버님을 따라 다니기는 했지만, 내가 몸도 약한 편에다 집을 자주 비우시는 아버님 입장에서 장남인 제가 어머님을 도와 집을 지키기를 원하셨어요. 저도 나무에 대해서 잘 알아야하고, 현대건축에 비해 한옥건축은 너무 어렵다는 생각에 아버님처럼 잘 할 자신도 없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저 아버님이 대단하셨고, 너무 존경스러울 뿐입니다.
-아버님을 따라 목수 일을 하셨던 작은아버님(정국진, 1934년생)께서 <문화재수리기술자 목수기능자 제160호>이고, 서천대목장 조교로 아버님 직계후계자로 계셨어요. 그런데 무형문화재 지정을 한두 달 앞두고 돌아가셔서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죠.
* 조사자 의견 : 제보자와의 여러 번에 걸친 면담을 통하여, 제보자는 아버님이 대목장으로 큰 업적을 남기셨으나 대를 잇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그 어려운 시절에 가족을 위해 타지를 고향삼아 다니시며 수고하신 아버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새로운 우리 지역의 가치 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채록하고 공유하는 마을기록활동가로서의 임무에 더 집중하자고 다짐을 해본다.
사진
<사진1> 서천군 한산면 건지산성 누각
한산면에 있는 정영진 선생의 업적 건축물 앞에서 제보자 정해천 님
<사진2> 한산면 충절로 1120. 대목장
한산면에 있는 정영진 선생의 업적 건축물 앞에서 제보자 정해천 님
<사진3> 대목장 정영진 선생의 주요 업적들
출처: 시사뉴스저널2010.12월호 P.112
기록개요
생산자료
생산 자료 : 사진 2장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시초면 후암2리 지명을 아는 주민 3인(1940~60년대생)을 대상으로 면담한 내용을 글로 정리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1차 때 마을 주민을 만나 자연마을과 지명을 개략적으로 파악하였다.
파악된 지명에 대해 관련 문헌과 인터넷을 검색하여 지명 유래를 정리했다. 2차 때 마을 주민을 만나 자연마을이나 해당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주민들 스스로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시간이 걸릴 때는 사전에 문헌이나 인터넷에서 수집한 내용을 조금 알려주고 가능한 주민들이 지명의 유래를 알아내도록 하였다. 최종적으로 주민들과 지명의 유래를 검토하고 토의하여 결정하는 단계를 거쳤다.
□ 후암리 자연마을을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후암2리에는 갓점, 부아티, 안상굴, 유둑배라는 자연마을이 있어요. 현재 이 마을은 모두 주민이 거주하고 있어요.
※ 조사자 의견
후암리는 조선 초에 서천군이었고 조선 말 서천군 시왕면(時旺面)의 지역 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갈물리(曷勿里) · 유도리 (有道里) · 후동리(後洞里) 일부와 한산군 하북면(下北面) 신리(新里)의 일 부를 합쳐 후동(厚洞) · 유도암(有道岩)의 이름을 따서 후암리라 해서 서천군 시초면에 편입된 마을이다.
후암2리는 길산천을 경계로 하여 후암1리와 뚜렷하게 마을이 구분되고 있다. 길산천은 서천군 최대의 금강지류로 길이 23.0㎞이다. 문산면 금복 리 원진산(269.9m)에서 발원하여 남류하고 화양면 망월리에서 금강으로 유입한다. 시초면 후암리를 지나는 길산천의 길이는 2.3km이다. 문산면, 마산면, 시초면, 기산면, 서천읍, 화양면, 마서면의 7개 읍·면이 길산천 유 역에 위치하고있다.
□ 마을이 [앞], [뒤]의 위치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부아티가 있어요. ‘부아티’는 마을이 밭 뒤에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아요.
※ 조사자 의견
부아티는 밭과 관련된 지명으로 생각된다. ‘밭뒤’->‘밭이’->‘바티’->‘부아티’로 어형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주민에 의하면 예전에 마을 앞쪽으로 밭이 있었지만, 경지정리를 하면서 밭이 논으로 지목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 마을이 안팎의 위치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안상굴이 있어요. ‘안상굴’는 산의 안쪽에 마을이 위치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생각해요.
※ 조사자 의견
안상굴에서 ‘안[內]’이라는 글자는 어떤 장소의 내부를 의미한다. ‘안상굴’ 은 산과 관련하여 마을이 산의 안쪽에 위치하므로 ‘안산골’이라고 부르다가 발음할 때 편의상 안산골이 ‘안상굴’로 부르기 쉽게 어형이 변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물건의 생산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갓점이 있어요. ‘갓점’은 옛날에 갓(笠)을 만드는 사람이 살았고, 갓을 파는 점포가 있어서 갓점이라고 부르게 된 것 같아요.
※ 조사자 의견
조선시대 여러 지역에 갓을 만드는 사람이 살았거나 갓을 만들어 파는 점포가 있으면 ‘갓점’이라고 불렀다. 하나의 예로 서천군 기산면 화산리에 갓점이라는 마을이 이에 해당한다. 어떤 마을은 형상이 갓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 부여 입포라는 마을이 이에 해당한다.
조선 후기 영조 시대에 면(面), 리(里)명을 보면 시방동면에 입점리(笠店 里)가 있었다. 입점은 갓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조 때까지 ‘입점이라 고 부르다가 그 이후 언젠가부터 ‘갓점’이라고 불린 것으로 생각된다.
□ 새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매봉산이 있어요. 산 모양이 마치 매처럼 생겼다고 해서 ‘매봉산’이라고 불러요.
※ 조사자 의견
‘매’를 응(鷹)의 뜻으로 보아 ‘매처럼 생긴 산’, ‘매가 앉아 있는 모양의 산’, ‘매를 놓아 산양하던 산‘ 등으로 해석한다. 또는 ’매‘를 ’山(산)‘을 뜻하는 일반 명사 ’뫼‘의 다른 형태로 보고 주변 가까이에 있는 산이어서 ’매 ‘라고 했다가 ’산봉우리‘임을 분명히 보이기 위해 한자 ’봉(峰)‘을 덧붙여 ’ 매봉‘이라고 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따라서 매봉’은 ‘산’을 뜻하는 두 요소가 중첩된 어형이 된다. ‘매봉’에 ‘봉(峰)’과 의미가 같은 ‘산(山)’을 덧붙여 ‘매봉산’이라고 부른 것이다. 후암2리에 있는 매봉산의 높이는 84.0m이다.
□ 가축의 형상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유둑배[유동바위, 유도암]가(이) 있어요. ‘유둑배[유동바위, 유도암]의 유래는 매봉산 꼭대기에 바위가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우두(牛頭)바위 또는 유독바위라고 불러요. 그리고. 이 바위 아래에 있는 마을을 유둑배{유동바위, 유도암(有道岩)}라고(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마을 사람들은 ‘유둑배’라고 많이 불러요.
※ 조사자 의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왕면에 유도리(有道里)가 있었다. 매봉산에 있는 바위 형상이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우두(牛頭) 바위 또는 우두암(牛頭岩)이라고 했다. 처음에 우두바위[우두암]라고 부르다가 발음 편의상 어형이 다양하게 변형되어 바위 이름은 유독바위라고 부르고, 마을 이름은 유둑배, 유동바위, 유도암이라고 부른 것 같다.
[ 참고 문헌 ]
서천군, 서천군지, 1988
서천군지편찬위원회, 서천군지, 2009
서천문화원, 시초면지, 2019
사진
<그림1> 1910~1930년 지형도(후암리)
※ 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그림2> 시초면 후암리 마을
※ 출처 : 서천군행정지도(2022)
<그림3> 시초면 후암리 행정구역
※ 네이버 지도 활용
<그림4> 시초면 후암2리 지명(위성지도)
※ 네이버 지도 활용
<그림5> 시초면 후암2리 지명(지형지도)
※ 네이버 지도 활용
<사진1> 길산천(2023년 11월)
<사진2> 유둑배(2023년 11월)
<사진3> 매봉산(2023년 11월)
<사진4> 안상굴(2023년 11월)
<사진5> 부아티(2023년 11월)
<사진6> 갓점(2023년 11월)
기록개요
생산자료
생산 자료 : 그림 2점, 사진 6장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시초면 후암1리 지명을 아는 주민 3인(1940~60년대생)을 대상으로 면담한 내용을 글로 정리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1차 때 마을 주민을 만나 자연마을과 지명을 개략적으로 파악하였다.
파악된 지명에 대해 관련 문헌과 인터넷을 검색하여 지명 유래를 정리했다. 2차 때 마을 주민을 만나 자연마을이나 해당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주민들 스스로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시간이 걸릴 때는 사전에 문헌이나 인터넷에서 수집한 내용을 조금 알려주고 가능한 주민들이 지명의 유래를 알아내도록 하였다. 최종적으로 주민들과 지명의 유래를 검토하고 토의하여 결정하는 단계를 거쳤다.
□ 후암1리 자연마을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후암1리는 뒷굴, 용두쟁이[용두정], 후동, 분덕골, 안텃굴, 원당굴이라는 자연마을이 있어요. 주민이 사는 마을은 뒷굴, 용두쟁이[용두정], 후동, 안텃굴이고 분덕골, 원당굴은 사람이 살지 않아요.
※ 조사자 의견
후암1리는 길산천을 경계로 하여 후암2리와 뚜렷하게 마을이 구분되고 있다. 길산천은 서천군 최대의 금강지류로 길이 23.0㎞이다. 문산면 금복 리 원진산(269.9m)에서 발원하여 남류하고 화양면 망월리에서 금강으로 유입한다. 시초면 후암리를 지나는 길산천의 길이는 2.3km이다. 문산면, 마산면, 시초면, 기산면, 서천읍, 화양면, 마서면의 7개 읍·면이 길산천 유 역이다. 후암1리는 문산면 지원리, 시초면 풍정리, 시초면 봉선리와 인접 하고 있다.
□ 마을이 [앞], [뒤]의 위치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뒷굴과 후동(後洞)이 있어요. ‘뒷굴’은 마을이 뒤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렇게 부르고 있어요. ‘후동’은 뒷굴을 한자로 부르는 마을 이름이라는 생 각이 들어요.
※ 조사자 의견
뒷굴과 후동은 똑같이 마을이 뒤[후]에 있다는 의미이다. 조선 후기 영조 시대 면(面), 리(里) 체제에 의하면 시방동면(時方洞面)에 후동리(後洞里)가 기록되어 있다. 후동(後洞)은 뒷굴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생겨난 마을 이름인 것 같다. 뒷굴과 후동(後洞)의 차이는 한자 後(뒤 후)에서 훈을 빌려서 ‘뒷굴’, 음을 빌려서 ‘후동’이라고 명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후동이라는 마을명은 뒷굴을 포함하여 후동리라고 부르다가 리(里) 명칭이 개편되면서 ‘후동리’는 없어졌지만, ‘후동’이라는 명칭만이 남게 된 것 같다.
□ 용[왕]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용두쟁이가 있어요. ‘용두쟁이’는 마을의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고, 용두정(龍頭亭)이라고도 해요. 용두쟁이는 뒷굴 동쪽에 자리 잡고 있어요.
※ 조사자 의견
‘용두쟁이’는 처음에 ‘용두정이’라고 부르다가 발음 편의상 ‘용두쟁이’로 어형이 변형된 것으로 생각된다. 용두정(龍頭亭)이라는 이름은 ‘지형이 용의 머리같이 생겼다’라고 하여 부르고 있다. ‘용두정’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접미사 ‘정(亭)자로 보아 옛날 이곳에 정자(亭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묘지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분덕골재가 있어요. ‘분덕골재’는 공동묘지가 있어 ‘분덕골’이고 이곳을 지나서 풍정리로 넘어가는 고개이기 때문에 ‘분덕골재’라고 부른 것 같아요. 분덕골 입구에 들어서면 예전에 어떤 가난한 사람이 벽돌 대신 뗏장으로 벽을 쌓아 지은 뗏장집이라고 부르던 주막집이 있었어요.
※ 조사자 의견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서 ‘분덕골’이라는 지명이 나타나고 있다. 이 지명은 주변에 공동묘지가 분포하고 있어 ‘분덕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는 분청 사기 등을 굽는 분토가 나와서 ‘분토골’일 수도 있다. 그런데 시초면 후암리 분덕골은 주변에 공동묘지가 있고, 예전에도 이곳에 고려장이 많이 나왔다고 함으로 공동묘지와 관련이 깊은 지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덕골재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형이 변화되어 부르기 쉽게 부덕골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천군의 행정지도에는 부덕골재라고 기록하고 있다.
□ 마을이 안팎의 위치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안텃굴이 있어요. ‘안텃굴’은 마을이 골짜기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 조사자 의견
안텃굴에서 ‘안터’라는 말은 어떤 장소의 내부인 안[內]쪽을 의미한다. 안텃굴은 마을이 골짜기 안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안텃굴은 조선시대 이괄의 난 당시 천안 군수를 지내던 사람이 이곳으로 난을 피해 와서 살게 된 것이 현재 이 마을에 사는 고성이씨의 16대 선조라 하며, 그로 인해 고성이씨가 많이 살아왔던 마을이다.
□ 무속 신앙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원당굴이 있어요. ‘원당굴’은 주변 지역에 잘 알려진 여자 무당인 ‘당골’이 살고 있는 골짜기라서 그렇게 부른 것 같아요. 실제로 원당굴에는 여성 무속인인 무당이 1990년대 말까지 살았어요.
※ 조사자 의견
토속신을 제사 지내는 사당(詞堂), 당산(堂山)이나 또는 무당(巫堂)이 있던 곳에는 ‘당골[堂谷]’이라는 지명이 붙여진 곳이 많다. 특히 여자 무당을 ‘당골’이라고 한다. 당(堂)에 대한 지명은 당곡(堂谷), 원당(元堂), 사당(舍堂) 등의 형태로 전국 곳곳에 남아 있다. 원당굴은 원당이 있었던 골짜기 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을 주민에 의하면 ‘후암1리에 속하는 원당굴에는 여러 채의 집이 있었고 그중에 신내림을 받아 신을 섬기며 굿을 하는 여성 무속인이라 불리는 무당이 활동하는 법당이 차려진 집이 존재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 숨어 있다는 뜻인 은(隱)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엉고개가 있어요. ‘엉고개’는 마을에서 혼자 지나가려면 음침하여 무서웠던 고개였어요. 고개가 제법 길고 인적이 뜸한 산속을 지나 넘어가는 고개여서 그렇게 부른 것 같아요.
※ 조사자 의견
엉고개 너머에 사는 주민들에 의하면 옛날에 고개가 길기도 하고 음침하여 혼자 걷기에는 무서운 길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또한 고개 넘을 때 돌은 던지던 서낭당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지명 ‘엉고개’는 ‘엉’과 ‘고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엉’은 경상도와 전라남도에서 낭떠러지를 말하는 방언이다. 또 다른 뜻은 ‘엉’은 ‘어은’의 변화형으로 어은고개->언고개->엉고개’로 될 수 있다. ‘어은고개’은 대부분 ‘은고개’과 함께 쓰임을 볼 때, ‘엉고개’ 또한 ‘은고개’와 대응시킬 수 있다. ‘은고개’는 ‘은(隱)’과 관련하여 숨은 고개로 해석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엉고개는 숨은 고개의 의미와 더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참고 문헌 ]
서천군, 서천군지, 1988
서천군지편찬위원회, 서천군지, 2009
서천문화원, 시초면지, 2019
사진
<그림1> 시초면 후암리(1910~1930년대)
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그림2> 시초면 후암리 마을
출처 : 서천군행정지도(2022)
<그림3> 시초면 후암리 행정구역
※ 출처 : 네이버 지도
<그림4> 시초면 후암1리 지명(위성지도)
※ 네이버 지도 활용
<그림 5> 시초면 후암2리 지명(지형지도)
※ 네이버 지도 활용
<사진1> 원당굴(2023년 11월)
<사진2> 안텃굴(2023년 11월)
<사진3> 분덕굴재(2023년 11월)
<사진4> 엉고개(2023년 11월)
<사진5> 후동(2023년 11월)
<사진6> 용두쟁이(2023년 11월)
<사진 7> 뒷굴(2023년 11월)
<사진 8> 길산천(2023년 11월)
기록개요
생산자료
생산 자료 : 그림 2점, 사진 8장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 선도리 자연마을을 아는 대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선도리는 솔머리, 용수말, 왕마지[양마지]라는 자연마을이 있어요.
※ 조사자 의견
선도리는 서해 연안에 접하고 있으므로 마을이 대부분 평지에 분포하고 있다. 선도1리에 솔머리, 선도2리에 용수말, 선도3리에 왕마지 자연마을이 있다. 왕마지는 동네에서 양마지라고 부른다. 솔머리에는 묘금도(卯金刀) 유씨(劉氏)와 밀양(密陽) 박씨(朴氏)의 집성촌이 있다.
□ 나무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솔머리와 솔안이 있어요. ‘솔머리’는 옛날부터 소나무가 무성하여 마을이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솔머리, 송두(松頭)라고 하지요. ‘솔안’은 솔머리에서 북동 방향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 조사자 의견
해안에 인접하여 자라는 소나무인 해송은 바람에 의해 형성되는 사구(砂丘)의 모래를 고정시켜 주고, 바다에 인접한 동네에 겨울철 차가운 북서 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해안에 소나무가 무성하여 그것이 마을을 대 표하는 상징물이 된 것이다. 우리 눈에 잘 띄는 외형적인 자연물이 마을 의 지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솔머리는 바다에서 배가 들어오는 곳이므로 배들이, 선입(船入), 선임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는 솔머리는 배들이 지역으로 선동(船東)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선서(船西)로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최근에 ‘솔머리’라는 지 명이 자연마을을 대표하고, 그 밖에 송두(松頭), 배들이, 선서라고도 부른다. 솔머리는 해안선과 거의 평행하게 북서-남서 방향으로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북서 방향에 있는 마을을 큰뜸, 남서 방향에 있는 마을을 작은뜸이라고 불렀다. ‘뜸’은 한동네 안에서 여러 채의 집이 따로 모여사는 구역을 의미한다. 큰뜸과 작은뜸은 모여있는 것은 같지만, 많이 모여 있으면 ‘큰뜸’이고 적게 모여있으면 ‘작은뜸’이 된 것이다. 마을 명칭이 규모를 기준으로 나누어졌다. 또한 솔머리의 작은뜸 동쪽에 솟대가 있었던 곳을 솟대배기라고 불렀다. 또한 솔머리와 솔안은 서로 관련이 있는 명칭이다. 따라서 솔머리에 속하는 마을은 ‘큰뜸’, 작은뜸‘, ’솟대배기‘가 있고, 별도로 솔안이 있다.
□ 용[왕]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용수말, 왕마지[용지]가 있어요. ‘용수말’은 지형의 형상이 용의 머리 부분 같은 마을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러요. 용수말은 ‘배들이’라는 마을에서 볼 때 동쪽에 위치하므로 선동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또한 용과 관련되는 마을은 용지 또는 왕마지[양마지]가 있어요. 이곳은 용이 하늘로 승천한 용못 옆에 있으므로 그렇게 부르는 마을 이름이지요.
※ 조사자 의견
선도2리에서는 대표지명으로 선동보다는 용수말이라는 마을명을 많이 사용한다. 배와 관련된 지명보다는 용과 관련된 지명을 선호하고 있다.
선도3리에서는 마을명을 용지보다 왕마지[양마지]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용지 또는 용못에서 앞에 용의 글자는 용(龍)으로 같은 한자지만 뒤에 ‘지’와 ‘못’이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사용하는 차이이다. 즉, 한자 池(못 지)에서 음은 ‘지’이고 훈은 ‘못’이 된다. 따라서 음을 빌리면 ‘용지’이고 훈을 빌리면 ‘용못’이 된다. 둘 다 용이 하늘로 승천한 ‘지’와 ‘못’이 되어 용지 또는 용못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용지[용못]에서 용(龍)은 왕(王)을 상징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마을명인 왕마지는 한자로 王馬池(왕마지)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도 용지[용못]과 왕마지에서 ‘용’자와 ‘왕’자가 대응하고 ‘지(못)’자와(가) ‘지’자와 대응하고 있어 글자만 다르고 의미는 같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선도2리 마을은 용수말 또는 선동이라 부르고, 선도3리는 왕마지 [양마지] 또는 용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 솟대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솟대배기가 있어요. ‘솟대배기’는 옛날에 솟대가 있던 자리라 하여 그렇게 불렀어요. 옛날부터 동네 어른들께 들어서 알고 있어요.
※ 조사자 의견
솟대배기는 옛날에 수호신으로 모셨던 솟대가 박혀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마을 풍어제(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배가 있는 집만 각자 지내고 있다. 솟대 부근에 솟대배기샘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마을의 상징이 되거나 마을의 중심이 될 만한 것이 마을에 있으면, 그것이 마을 이름의 소재가 되었다. 솟대는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혀 마을 수호신으로 믿는 상징물이다. 솟대배기는 배들 이 동쪽에 있는 터이다. 솟대배기터는 솔머리에서 용수말 입구까지라고 알려져 있다.
□ 군사와 방어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망생이가 있어요. ‘망생이’는 선도리 앞바다로 침입하던 적을 방어하기 위해 망을 보던 곳이어서 망생이라고 불러요. 예전에 동네 어른들은 망생이를 망선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나요.
※ 조사자 의견
망생이 마을은 인근의 송산(宋山)에서 키운 소나무를 베어 덤장을 만드는 목재를 대어 주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망생이는 망을 보던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던 지역이기도 하다.
망생이는 풍수지리적으로 ‘배 형국’이라 집에 재물이 모이면 배가 무거워져 가라앉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부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마을을 떠났다 고 한다.
□ 고개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오얏재가 있어요. ‘오얏재’는 선도리에서 성내리로 넘어가는 고개지요. 옛 날에 아주 좁은 외길이었어요. 아마도 그래서 오얏재라고 부른 것 같아요. 동네에서 땅을 사서 좁은 길은 넓혔어요.
※ 조사자 의견
예로부터 비인면 선도리와 성내리를 왕래가 빈번했던 중심이 되는 고개 였다. ‘오얏’은 우리말에서 오랜 옛날에 '어버이, 크다'라는 의미로 쓰였었 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 고개는 선도리에서 성내리를 왕래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길이었으므로 ‘오얏재’라고 불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장래 풍습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영정 모탱이(모퉁이)가 있어요. ‘영정 모탱이’는 고인의 사진을 검정색 액자에 끼우고 검정색 리본을 두른 것을 영정(影幀)이라고 하는데, 돌아가신 분을 상여로 운구할 때 앞에서 영정을 모시고 가지요. 영정을 들고 산모탱이를 돌아가는 데서 ‘영정 모탱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 조사자 의견
상여 나갈 때 고인이 생전에 다니던 길이나 많이 즐겨 찾았던 장소를 거쳐 운구하게 된다. 선도리 마을에서도 상여가 출발하면 운구가 시계 방향으로 상여가 이동하는데 고인의 영정을 들고 다리도 건너고, 모퉁이도 지나는데 특히 영정이 건너는 다리를 ‘영정 다리’라고 부르고, 영정이 지나가는 산모퉁이를 ‘영정 모탱이’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 둠벙[샘]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참삿골이 있어요. ‘참삿골’은 찬물이 나는 둠벙이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에요. 둠벙의 크기는 긴 변이 6m, 작은 변이 4m 정도 되었어요. 둠벙의 물이 차서 여름철에 그물로 친구들과 같이 상체를 굽혀 엎드린 채로 친구의 도움을 받아 허리에서부터 목까지를 물로 씻었던 등목이 생각나요. 물이 너무 차고 시원해서 자주 사용했던 기억이 있어요.
※ 조사자 의견
‘참삿골’에 있는 둠벙[샘]은 가장 위쪽에 있는 다랑논에 있었다. 참삿골은 차가운 둠벙[샘]이 있어서 처음에 찬샘골로 불리다가 부르기 쉽게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매립되어 볼 수 없다. 아마도 물이 너무 차가워 농업용수 등 사용이 어렵기도 하고, 지하수가 보급되면서 매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 도난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도적골이 있어요. ‘도적골’은 옛날 가난한 시절에 마을에서 물건을 많이 도둑맞아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사람들이 이 마을을 지나 종천을 거쳐 판교우시장을 다녔다고 동네 어른들께 들은 적이 있어요.
※ 조사자 의견
도적골은 사람들이 시장을 다니는 길목이기 때문에 도둑을 많이 맞은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동네의 인심이 흉흉해져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쇠퇴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섬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쌍도가 있어요. ‘쌍도’는 비인 갯벌에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래서 쌍도라고 불러요. 전설도 전해져요. 최근에는 쌍도 주변의 갯벌에서 맛조개를 잡는 등 갯벌 체험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쌍도는 현재 사유지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개발에 어려움이 있기도 해요.
※ 조사자 의견
1) 쌍도에 대한 고문헌 기록 내용
조선시대에 작성된 고지도에는 쌍도가 나와 있다. ‘호서지도’와 ‘해동지도’의 비인현 지역에는 섬이 나란히 있다는 의미로 ‘竝島(병도)’라고 표 시되어 있다. 특히 ‘호서지도’의 여백에는 쌍도에 대한 설명이 추가되어 있는데 ‘竝島周回四里居住民無居官門七里’라고 적혀 있다. 이는 병도(쌍 도)의 둘레는 4리(1.6km)이며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 없고, 관아까지의 거리는 7리(2.8km)이다‘라는 의미이다.
2) 쌍도에 대한 전설
전설 1
쌍도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무인도이며, 옛날 쌍둥이를 둔 홀아비가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죽자 아들 쌍둥이가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다 죽어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설 2
’이무기와 김총각‘이라는 전설이 있다. 선도리는 옛날에 홍수가 나면 금강 상류로부터 떠내려 오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큰 집, 죽은 돼지, 통나무 등이 떠내려왔으며 이런 것들은 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가 되었다. 그래서 홍수가 나면 바닷가에 사람들이 모여 무엇이 떠밀 려 오는지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어느 해인가 홍수가 났는데 물 중간에 큰 통나무가 떠밀려 오고 있었다 고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큰 나무는 갖게 되면 소득이 되기 때문에 서로 가지려고 하였다. 이웃 동네에 사는 ’김 총각‘이라는 사람이 큰 통나무 를 먼저 갖기 위해 물을 헤엄쳐서 갔다고 한다. 그런데 헤엄쳐서 건너가 보니까 통나무가 아니라 수염이 난 용과 큰 구렁이 사이의 이무기였다. 그래서 김 총각이 홱 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무기가 김 총각 뒤를 쫓았다. 물속에서는 이무기를 사람이 속도로 이길 수 없지만 꼭 잡아먹히게 생겼는데도 이무기가 사람을 못 잡았다고 바닷가에서 사람이 여러 명이 보았는데, 김 총각이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날고 있었다. 그래 서 이무기는 김 총각을 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알고 보니까 김 총각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있었는데, 위급한 상황이 되어 김 총각이 날았던 것이다. 그런데 옛날에 기인이나 이상한 장수가 나 오면 역적질을 한다고 생각하여 없앴다고 한다. 김 총각의 집안에서도 문중회의를 하여 집안의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해 김 총각이 자고 있는데 팔 다리를 꽁꽁 묶고 날개를 잘라 버렸다. 그래서 날개를 자르자 피가 천장까지 솟구쳤지만 그래도 날개가 붙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날개를 붙지 못하게 하려고 재를 뿌려 결국 그 총각은 죽었다고 한다.
김 총각을 쫓았던 이무기는 쌍도에서 나왔다. 쌍도의 꼭대기 밑에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가 있는데 거기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용이 되기 직전에 홍수가 나서 바람결에 밖에 나왔다가 이런 일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그 후 십년 공을 들여 하늘에 올라가려고 하는 순간에 임산부가 그 장면 을 목격하였고 부정 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 참고 문헌 ]
서천군, 서천군지, 1988
서천군지편찬위원회, 서천군지, 2009
서천문화원, 비인면지, 2016
사진
<그림 1> 비인면 선도리 행정구역
※ 출처 : 네이버 지도
<그림 2> 비인면 선도리 지명(위성지도)
※ 네이버 지도 활용
<그림 3> 비인면 선도리 지명(지형지도)
※ 네이버 지도 활용
<사진1> 솔머리(2023년 11월)
<사진2> 큰뜸(2023년 11월)
<사진3> 작은뜸(2023년 11월)
<사진4> 솟대배기(2023년 11월)
<사진5> 솔안(2023년 11월)
<사진6> 용수말(2023년 11월)
<사진7> 오얏재(2023년 11월)
<사진8> 왕마지(2023년 11월)
<사진9> 참삿골(2023년 11월)
<사진10> 도적골(2023년 11월)
<사진11> 망생이(2023년 11월)
기록개요
생산자료
생산 자료 : 그림 2장, 사진 12장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