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자가 어렸을 때, 1970년대 장항 장날이면 커다란 빗자루를 한 묶음 어깨에 메고 팔러 나와 우리 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던 연세 지긋한 아주머니가 계셨다. 그분은 우리 가르메(삼산리) 고모님 댁 옆 마을 고살메(서천읍 삼산3리)에서 사셨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분이 빗자루를 집에서 만들었다고 해서 신기했고, 또 팔러온 빗자루가 우리 집에서 사용하는 빗자루보다 훨씬 컸던 것이 신기했었다. 지금도 눈에 선한 모습은, 빗자루가 몇 개인지는 모르나 하나씩 차곡차곡 엮어서 어깨에 가득 둘러메고 들어오던 모습이다. 언제부턴가 그분은 보이지 않았고, 그때 그 기억을 생각하며 알아보니 그 빗자루는 ‘갈꽃비’라는 이름의 갈대로 엮어 만든 빗자루였다. 지금은 시중에서 거의 볼 수 없는 갈대로 엮은 빗자루, 그 빗자루에 대해 기록을 남겨두고 싶어 고살메를 찾았다.
먼저, 그곳이 지금도 갈꽃비를 만들고 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 고살메 이장과 통화를 했고 현재 다섯 집 정도가 갈꽃비를 엮고 있고 본인도 갈꽃비에 대해 잘 아니, 아는 대로 얘기해 주겠다는 반가운 말씀을 듣고 약속을 잡아 만났다.
[고살메 마을 현종규 이장과의 면담내용]
조사자 : 이름과 출생년도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구술자 : 현종규, 56년생유. 조사자 : 고향이 어디이신가요? 구술자 : 고살메, 삼산3리 고살메 마을유. 여기서 태어나서 여기서 지금까지 살고 있슈. 조사자 : 그럼 이 마을에서 평생을 지내신 거네요? 타지에 나가신 적은 없으셨는지요? 구술자 : 왜요. 젊었을 때는 바깥에 나가서 이런 저런 일도 혀보긴 혔지만, 대부분 여기서 쭉 살았다고 봐야쥬. 조사자 : 지금까지 주로 무슨 일을 하셨어요? 구술자 : 농사도 짓고 빗자루도 만들고, 주로 농사짓쥬.
[ 갈대꽃비 제작에 대하여 ]
조사자 : 갈대꽃비는 몇 세부터 만드셨어요? 구술자 : 20대 때부터 만들었다고 봐야쥬. 조사자 : 갈대꽃비 만드는 것을 누구에게 배우셨어요? 구술자 : 따로 배우지는 않고 오며 가며 어른들 하는 걸 보고 배웠지 딱히 누가 가르쳐주고 혀든 안 혔슈. 집에 오면 으른[어른]들이 늘 하고 계싱게 어깨 너머로 보고 그대로 따라서 혔지 따로 배우고 그런 거 없었슈. 조사자 : 갈대꽃비는 어디서, 누구와 만드셨어요? 구술자 : 집에서 혔슈. 혼자서는 허기 힘들어유. 집사람이 도와줘야지. 방은 좁 아서 맬 수 없고, 헛간에 쌓아놓고 부부간에 밤에 매서 아침 일찍 팔러 갔슈. 집사람은 이고 팔러 댕기고 나는 어깨에 메고 다니고. 그때는 아줌마들은 머리에 잔뜩 이고 다녔고, 남자들은 어깨에 메고 팔러 나갔쥬. 조사자 : 갈대 채취는 어디서 했나요? 고살메에서 나는 갈대로 했나요? 여기가 신송리 갈대밭이 가까운데 거기 가서 채취했나요? 구술자 : 여기서 나기는 혀도 양이 부족했고, 또 여기 것은 질이 나뻐서 쓸 수 가 없슈. 대천천이나 갑천. 조사자 : 갑천요? 대전 갑천요? 구술자 : 야. 거기뿐이간디유, 고산천, 전주천, 보령댐 부근 사방간디 안 가는 디가 없슈. 심지어 강원도 까장[지]도 갔슈. 저기 경기도 임진강, 한탄강, 전라도, 영산강, 낙동강, 전국적으로 안 가는 곳이 없었슈. 8월에 갈대꽃 을 사러 댕기는디 그 지역 주민한테 갈대꽃 뽑아서 건조해 놓으라고 미리 주문을 해 놓으면, 그 사람들이 갈대꽃을 말려 놔유. 그러면 우리가 가서 사오는 거쥬. 조사자 : 그때는 자가용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운반해 왔나요? 구술자 : 화물트럭 대절혀서 가기도 허고 여기서 서천역까지 화물로 붙여오면, 인력거나 리어커, 경운기 끌고 가서나 받아오기도 하고 했슈. 조사자 : 갈대꽃비는 몇 월에 만드셨어요? 구술자 : 농삿일 다 마치면 농한기 때 혔슈. 긍게 11월에서 2월까장 노느니 빗자루 맷쥬. 농한기 때 좋은 부업이었응게. 그때는 집집마다 건진 다 허다 싶이 했슈.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에 우리 마을이 갈대꽃비 부업 단지로 지정을 받아서 갈대꽃 사도록 저리융자를 해줬슈. 우리 마을이 70호쯤 됐었는디 40호 이상이 빗자루를 만들었응게 경[굉]장혔쥬. 조사자 : 갈대꽃비 만드는 방법을 들려주세요. (비법?) 구술자 : 비법은 따로 없슈. 집집마다 부모네들이 다 하고 있응게 오며 가며 어깨 너머로 배운 거지 일부러 배우지도 않았구. 비법이니 그런 거 없슈. 지금은 플라스틱이랑 나이롱끈을 사용하지만, 그전이는 왕골을 절개해 서 자루 덮개 맨들고, 모시 사다 물들여서 끈으로 사용했슈. 조사자 : 갈대꽃비를 어떻게 파셨어요? 구술자 : 서천 그릇가게나 철물점에 도매로 넘기기도 하고. 군산, 익삭, 전주, 진 안, 홍성, 정읍 시장 안 철물점에 갔다줘유. 서천시장에 빗자루점이 있기도 했구. 주로 새벽에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남자들은 어깨에 메고 충남권허구 전북권으로 팔러다녔슈. 아침 일찍 계동으로 나가서 장항 도선장에 가서 군산으로 너머가서 군산 시장에 넘기기도 하고, 집집마다 댕기면서 팔기도 하고. 군산서는 시내서는 잘 안 팔려유 시내 바깥티, 외곽으로 댕겨야 잘 팔렸슈. 군산터미널에서 전주로도 가도, 진안으로도 가고 주로 외지로 돌아댕기면서 팔았슈. 조사자 : 그렇게 다니시면 점심은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셨나요? 구술자 : 도시락 못 들고 다녀유. 빗자루가 20자루씩 짊어지고 가는디 도시락을 어떻게 들고 다녀유. 다니다가 시장 국밥집서 사먹기도 하고, 빵 사먹기도 혔쥬. 조사자 : 한 해에 몇 개나 만드셨나요? 구술자 : 1년이면 한 500자루 정도 만들었다고 봐야쥬. 금년이는 날이 너무 뜨거워서 갈밭이 상혀서 그전보담 반절밖에는 수확이 안 돼서 어쩔는지 모르겠네유. 조사자 : 지금도 만드는 집이 있나요? 구술자 : 현재 5가구가 하고 있슈. 조사자 : 갈대꽃비를 언제까지 만드셨어요? 구술자 : 현재까지도 허구 있슈. 조사자 : 갈때꽃비를 만들어서 팔 때를 생각하면, 가장 기억나는 일은 무엇인가 요? 구술자 : 대체로 잘 팔고 돌아오는디, 어떨 땐 아침새벽에 10자루나 20자루 지 고 나가서 하루 종일 팔러 댕겼는디, 다 못 팔고 돌아올 때, 5자루나 밖 에 못 팔 때가 젤 힘들었쥬. 발걸음이 무거워서 집에 오기 싫어유. 그거를 팔아야 애들 기성회비도 주고 육성회비도 주고 반찬도 사먹고 애들 옷도 사주고 양말도 사주고 간식도 사주고 월사금도 내고 혀야는디, 빈 손으로 들어오려면 발걸음이 안 떨어지쥬. 애들은 호야등불 들고 계동까지 마중 나와유. 뭐라도 사올 줄 알고 기다리는 거쥬. 애들이랑 식구들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못 팔았을 때는 짐을 다른 집에다 맽겨놓고 와유. 그때가 젤 안 좋았슈.
조사자가 어렸을 때(1970년대) 장항 장날이면 갈대로 만들었다는 커다란 빗자루를 한 묶음 등에 지고 팔러 나왔던 먼 친적 아주머니가 계셨다. ‘고살메’에서 오시는 분이셨다. 쪽진 머리에 몸집도 작으셨는데, 빗자루 뭉치로 뒤덮이다 싶이 들어서는 모습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저녁 늦게까지 빗자루를 팔러 다니시다가 우리집에서 주무시고 가시곤 했었다.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으셨던 그분의 소식이 궁금했고, 그분의 어깨에 늘 매여있던 빗자루. 일반 빗자루 보다 훨씬 컸고, 쓱쓱 잘 쓸어졌던 그 빗자루가 지금도 고살메에서 만들고 있는지 궁금했다. 고살메를 찾았을 때, 그 분은 오래전에 이사 가셨다고 했다. 그 빗자루는 ‘갈꽃비’라는 이름의 갈대로 엮어 만든 빗자루였고, 지금도 만드는 집이 있다고 했다.
점점 사라져 가는 ‘갈꽃비’에 대해 기록을 남겨두고 싶어 고살메를 찾았고 마을 이장님의 도움으로 ‘갈꽃비’를 만들고 계시는 ‘김종덕’님을 소개받았다.
[고살메 마을 김종덕님과의 면담내용]
조사자 : 이름과 출생년도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구술자 : 김종덕이구유, 74세(49년생)유.
조사자 : 고향이 어디이신가요?
구술자 : 고살메.
조사자 : 이 마을에 사신 지가 얼마나 되세요?
구술자 : 군대 갔다 와서 나가서 좀 어디 먹고살 것 없나 돌아대니다가 일루 들왔슈, 어머니가 혼자 계셔 가지구, 우리 내외가 나가 있어서 두 집 살림하기가 먹고 살기도 그렇고 혀서 고향으로 들어와서 농사짓고, 다른 사람들이 하니께 이것도(갈꽃비 만드는 일) 허구.
조사자 : 지금까지 주로 무슨 일을 하셨어요?
구술자 : 주로 농사짓쥬.
조사자 : 농사는 주로 무슨 농사를 지으셨나요?
구술자 : 벼농사유, 밭이 없어가지구.
[ 갈대꽃비 제작에 대하여 ]
조사자 : 갈대꽃비는 몇 세부터 만드셨어요?
구술자 : 으른들 하는 거 군대 가기 전이도 봤쥬, 어깨너머로 쳐다보고 혔는디, 군대 갔다 와서는 많이 혔쥬.
조사자 : 그러면 20대 후반쯤에 하셨겠네요?
구술자 : 군대 가기 전이도 허긴 혔슈. 20대 전이도 시간 있으믄 혔슈. 그땐 애들인게 지 맘대루 허구 싶으믄 허구, 허기 싫으면 않구. 군대 갔다 와서는 많이 혔쥬.
조사자 : 갈대꽃비 만드는 방법은 부모님에게 배우셨나요?
구술자 : 배우고 말구 헐 것두 없슈. 으른들 허는 거 어깨 너머로 보고, 그때 당시 그냥 또 되대유.
조사자 : 그때도 이런 장비가 있었나요?
구술자 : 그때는 코를 안 떳슈. 그때는 이것(코)을 안 떠줬어.
조사자 : 갈대꽃비는 어디서, 누구와 만드셨어요?
구술자 : 혼자 이렇게 집에서 혀유.
조사자 : 주로 부부가 함께 하셨다고 하던데, 아주머니께선 함께 하시지 않으셨나요?
구술자 : 집사람은 일체 안 거들었어유. 집안일허구 농삿일 허기도 바쁜게.
조사자 : 갈대채취는 어디서 했나요?
구술자 : 갈대꽃은 팔월이 질 더울 때 따야유, 8월달이, 8월초에 질(제일) 더울 때 따서, 말려서, 껍데기 빼서 말려놔유. 주로 많이 가져온 것은, 저기, 전라도 그어디냐 영산강이서 사 왔슈, 그기가 갈대가 많이 나구 갈대가 질이 조았슈. 강원도서도 사오는디 강원도는 굵고 잘 부서져유. 완주 고산서도 가져왔슈.
조사자 : 운반은 어떻게 하셨나요? 차를 대절해서 갔나요?
구술자 : 아니유. 거기 가서나 5톤 트럭 빌려서 싣고 와서나 집집이 다 나눴슈.
조사자 : 아, 그러셨군요. 개개인이 구매한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구매해서 가져오면 나누신 거네요?
구술자 : 개인이 사러가는 사람도 있었구, 우리는 거기서 싣고 오면 나눴쥬.
조사자 : 갈대꽃비는 몇 월에 만드셨어요?
구술자 : 딱히 때는 없는디, 인자 누가 매달라고 하면 매줫슈 농사철이는 허들 못 허구 바쁘니께. 농사철 지나믄 혔쥬. 그것두 한겨울이는 춰서 못허구. 먼지가 많이 나유.
조사자 : 갈대꽃비 만드는 방법을 들려주세요. (비법?)
구술자 : 방법이랄 게 따로 없구. 빗자루 매면서 이렇게 하믄 좋것다 싶으면 바꿔보고, 이쁘게 매면 좋잖유. (웃음) 코도 예전이는 안 혔슈.
조사자 : 갈대꽃비를 어떻게 파셨어요?
구술자 : 서천장이 나가서 있으믄 장사들이 사러와유. 그럼 그사람들헌티 넘겼슈.
조사자 : 도매로 넘기셨겠네요? 비를 매고 팔러 다니지는 않으셨나요?
구술자 : 나는 그러지는 않았슈. 장사들한티 넘겼지.
조사자 : 한 해에 몇 개나 만드셨나요?
구술자 : 한 해에 한 800개나 900쯤 맨들었쥬.
조사자 : 지금도 만드는 집이 있나요?
구술자 : 그 전이는 거진 다 맨들었는디 지금은 이걸(갈대꽃) 사기가 어려워서 점점 없어지구 지금은 두집이서만 혀유. 우리 집하구 저짝에 한 집. 수입(갈대꽃)도 있는디 수입은 못 써유. 금방 빠지고 부서지고 눈으로 봐두 차이가 나유. 그리구 우리야 마냥 부드럽지가 안 혀유. 뻣뻣혀서 마당이나 시멘트바닥 같은 디나 쓸 수 있슈.
조사자 : 갈대꽃비를 언제까지 만드실 것 같으세요?
구술자 : 이것(갈대꽃)만 구할 수 있으믄 힘닿는 디까지 헐수 있쥬. 이것두 여간 힘이 드는게 아녀유 손도 많이 가구 먼지도 많구. 더 늙으믄 허기 어려울 꺼유. 그려도 손 놓고 있을 순 없쟎유. 몸 쓸수 있을 때까장 혀 보는 거쥬. 이것두 없어지기 전이 나라에서 문화재로 지정혀 주문 좋을 틴디.
조사자 : 갈때꽃비를 만들어서 팔 때를 생각하면, 가장 기억 나는 일은 무엇인가요?
구술자 : 딱히 특별한 일이 없슈. 그냥 맹글구 여기저기서 주문 들어와서 통장에 입금된 거 보믄 좋구(웃음).
제보자는 시초면에서 태어나 문산면으로 시집왔다. 결혼 후 농사일을 하며 자식들 키우고 바쁘게 살아오면서, 어릴 적 친정어머니께서 하셨던 전통 장 담그기를 이어왔다. 최근에는 시간이 적게 걸리는 간단한 고추장 담그기를 해서 형제들과 자식들에게도 나눠준다.
■ 고추장을 전통방식으로 담가 오다가 간단하게 만들게 된 이유
문산면으로 시집와서 55년을 넘게 살아왔다. 살면서 아이들 돌보고, 집안 일 하고, 농사일을 했다. 일이 점점 많아져서 지치고 힘들었다. 식구들이 많으니 장도 빨리 없어지고 특히 고추장은 더 빨리 없어져서 많이 만들어 놓았다. 한 번 만들기 시작하면 3일 꼬박 걸리는 일이라서 힘들었다. 찹쌀가루에 엿기름을 섞어 가마솥에 끓여 조청을 만들어야 했고, 고춧가루와 메줏가루를 넣고 했다. 그러나 간단하게 담그는 방법을 알게 된 뒤로는 지금까지 그렇게 담그고 있는데 먹을 만한 맛이다.
6. 찹쌀가루가 물에 동동 떠오르면(찹쌀가루가 삭음), 불을 매우 약하게 줄이고 조려주기 시작한다.
(약 6시간 정도는 지켜보지 않아도 됨)
7. 조청보다 조금 묽게 되면 불을 끄고 식혀준다.
8. 완전히 식으면 미소된장을 넣고 섞어준다.
9. 곱게 갈아온 고춧가루를 섞어준다.
10. 소금으로 간을 하고 설탕으로 기호에 맞게 단맛을 조절한다.
11. 농도는 소금물을 끓여 식혀서 맞춘다.
12. 덩어리가 생기지 않도록 잘 비벼준다.
13. 시동생, 시누, 아들 등 나눠주기 위해서 중간 통에 담는다.
■ 현대식 고추장 담그기의 좋은 점
제보자의 말 : 메주가루를 사용하면 가루가 삭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기호에 따라 6개월 정도 걸린다. 숙성이 되면 맛있는 된장이 되지만, 농사일에 아이들 키우기도 바쁘고 많은 식구들에게 나눠주려면, 바로 먹을 수 있는 나만의 고추장 담그기가 좋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고추장을 담그는지 모르지만, 바쁘게 살면서 나만의 고추장 담그기를 귀농한 도시 사람들에게도 전수하고 있다.
서울 신길동에서 태어났다. 세 자매 집안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적 꿈은 글을 쓰는 작가였지만, 아동미술교육학을 전공하고 서양화를 전공하면서 서양화가의 길을 걸어왔다. 뒤늦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Q. 현재, 귀촌에 관한 이야기
미술협회 서천지부 소속으로 옮긴 일이 예술 활동을 하려는 마음으로 전입신고와 함께 제일 먼저 한 일이다. 남편이 귀농 2호가 되었고 땅값이 싸서인지 귀농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귀농인들을 끌어들이는지도 모른다. 마을에서 주민자치 위원회 청소년교육분과에서 일을 한다. 농사를 짓고 수확하는 재미도 느낀다. 눈에 보이는 잡초들, 눈에 보이는 수확의 기쁨이 크다. 만 3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 그림을 그린 것은 몇 편 안 된다.
Q. 내가 기억하는 과거 장소와 마을 주변 이야기
그림을 그릴 때 소재를 찾기 위해 시골 풍경을 촬영하러 다닌다. 초가집, 멋진 나무, 물레방아 등 시골스러운 곳을 찾아 다녔는데 귀농해보니 초가집은 거의 볼 수도 없고 새로 지은 집들이 주를 이루다 보니 내 생각과 시골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Q. 귀촌하기까지 관련해서 개인의 추억, 기억하는 이야기
서울토박이로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데 남편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허리 통증에 시달려 명예퇴직을 결정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벗어나본 적이 거의 없는데 전국에 땅을 보러 다녔다. 강원도 영월 쪽으로 가던 중 산에서 굴러 내려오는 돌에 자동차 앞 유리가 깨지기도 하면서 2년을 돌아 다녔다. 어릴 때 춘장대 해수욕장에 간 추억이 있어서 내려왔다가 서천에서 가장 싼 땅이 문산면 구동리라는 말을 들었다. 부여와 더 가까운 마을이다 보니 땅값이 싸고 가축을 대량으로 키우는 곳도 없어 공기도 맑다. 구동리를 돌다가 경치 좋은 곳이 있어서 담장 너머로 머리만 내민 마을 주민에게 땅이 있는지 물으니, “내 땅 살라우?” 해서 지금의 터전에서 살면서 이 마을과 좋은 인연이 되었다. 땅값이 싸서인지 귀농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마을이다. 주변 마을에는 귀농인이 거의 없는데, 이 마을이 귀농인들을 끌어들이는지도 모른다.
땅을 계약하고 나서 온라인 다음 카페에 가입했다. 귀농인 모임이었다. 판교 띠울마을이 운영하는 카페였다. 그때 회원들이 모여 귀농인을 위한 서천귀농센터가 만들어지고 협회도 만들어 졌다. 군에서 폐교를 리모델링해서 귀농인들이 정착하기까지 지원해주고 있다.
Q. 내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특별한 곳과 혹은 나만의 힐링 공간
집 뒤에 소나무 숲이 있다. 우리 땅이다. 마을에서는 ‘중뜸’이라고 부르는데, 하루에 한 번쯤은 산에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며 넓은 숨을 쉬어 본다. 그곳에서 미래 계획도 세우며 숲을 돌본다.
Q. 예술활동과 관련해 들려주고 싶은 과거나 현재의 이야기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는 어디에 공모전이 있는지 알아보고 급하게 서둘러 작품을 출품하던 일이 종종 있었다. 상을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귀농 후 그림전시나 상을 받는 일에 관심이 없다.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Q. 귀촌 후 서천에서 살아오시면서 예술과 삶의 조화로움에 관해
귀촌 예술인 경우 전업으로 예술활동을 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대부분 생활인으로서 지역에서 생활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 예술활동을 이어가는 것 같다. 도시에서 살 때는 공모전이나 그림을 생활의 부속품으로 여겼던 것 같은데 귀촌 후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같이 작업해 나가는 설치 예술이 적합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의 가치관이 바뀌었다. 도시에서는 예술에 대한 사회적 욕망이 컸다면, 귀촌 후에는 순수한 나의 욕망으로 살아가는 일이 너무 행복하다. 그림전시 활동에 치우치기보다는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더 좋다. 어르신을 위한 돌봄 관련 생활지원사 아르바이트로 만들기, 그리기 등을 하고 있다.
Q. 지금 활동하고 계시는 작업 소개
지금까지 구상, 반구상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 앞으로는 자연물을 이용한 설치 미술, 목공예도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려고 한다.
Q. 귀촌 후 마을 활동을 한 동기와 과정 지금까지 이야기
마을기록활동가로서 마을만들기 기초자료수집 일을 아르바이트로 했다. 인터뷰를 2년간 진행하면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을 만들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은 마을에 크고 작은 일들을 하면서 행복하다. 원 주민들이 ‘좋은 사람이 우리 마을에 왔다’고 고마움을 표현할 때에 큰 보람을 느낀다.
마을 부녀회 총무 활동을 하고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역량으로 마을 공동체와 같이 하는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특강 강사로 책을 읽고 독후감상화를 그리는 일을 하면서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 사실 도시에서는 내게까지 올 차례가 없다. 전전긍긍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조바심이 컸다. 지역에서 나를 찾아주는 일이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해준 셈이다.
충남대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도 되면서 서천 지역 화가를 지지해 줄 수도 있고 내가 설 자리를 만나니 기쁜 일이기도 하다. 귀촌함으로 얻는 만족감이 높다.
Q.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생활철학 또는 예술세계
마음이 편하면 몸도 건강하다는 생활 철학으로 살아간다. 예술세계라기 보다는 현실에 적합하게 미술학원 등을 운영하면서 하나의 스펙으로 기능했던 것 같다. 생활을 위한 예술이고, 그림 그리기는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연습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보니 돈을 버는 도구에 그쳤다. 호기심이 많다보니 필요로 하는 많은 것들에 관한 공부를 해서 자격증을 따고는 했는데, 그 쓸모가 적절하게 발휘되고 있다.
Q. 개인적으로 문화예술활동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나
마을에서 주민자치회 청소년분과 일을 하고 있다. 청소년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갖고 청소년들과 마을 환경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을 환경 변화에 앞장서고 싶다. 문화예술활동은 마을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이루어내는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며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Q. 특별히 기대하고 있는 문화예술활동
우리 집 뒤에 산이 있는데 소나무, 진달래, 대나무 등이 있어서 틈나는 대로 잘 가꾸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과 나무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간단한 소품들을 만들어 보거나 대나무, 소나무 등 자연물 그대로를 이용하여 자연설치미술 체험학습장으로서 자연미술관을 만들고 싶다. 능력이 된다면 자연물을 이용하여 간단한 소품을 제작하고, 치매예방미술 치료사로서 활동을 위한 미술재료도 만들어 보고 싶다.
Q. 서천 지역과 지역민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
서천은 공기 맑은 곳, 아직은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지역이다. ‘서천에 산다’라는 작은 동아리에 가입했다.
Q. 앞으로 기대와 계획
농사를 조금씩 짓고 있는데, 우리 주 생산물은 고사리다. 중뜸에 고사리 천지다. 4,5월은 고사리 따는 일로 바쁜데, 연 300만원 수입원이다. 그게 우리 연봉이고 꾸준하게 하는 일이며 기쁨을 주는 일이다. 이게 지속하기를 기대한다.
자연미술관을 만들어 학생들과 소외된 노인 분들과 소통하며 살기 좋은 행복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고 싶다. 중뜸에 만들어질 오두막과 협업으로 만들어가는 설치물로 자연미술관 체험학습장이 만들어지면, 학습장을 보러 사람들이 우리 마을로 모여드는 기대감으로 꿈을 꾼다.
Q. 인터뷰이로서 마무리로 하고 싶은 이야기
서천은 전체 인구수에 비해 아이들이 너무 적다. 문산면만 하더라도 초등학교 학생이 20명 정도다. 분교이지만 초등학교가 폐교되면 문산면은 초토화될 것이다. 학교 살리기를 위한 마을공동체의 노력에 힘을 쏟고 아이들이 늘어나는 서천을 만드는 데 힘을 모으고 싶다.
오래도록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 묻혀있어서 아무도 몰랐던 나무가2006년 원진산자락의 임도를 개통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은곡리에서 판교리 쪽 고개 밑으로 임도를 연결하려는 공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금복리 산13번지에서 삼지적송이 발견되었다. 임도가 그곳을 가로질러 가야하는데 소유자의 불허로 방향을 쇳골로 틀어서 한 바퀴 돌아서 연결되었다. 계획이 변경되어 만들어진 현재의 임도가 너무 험한 편이라 다니기에 불편하다. 그러나 조상묘소가 있다는 이유로 소유자가 허락을 하지 않아 길을 낼 수 없는 상황이다.
2. 보호수로 자리매김
임도공사 중 발견된 소나무는 재래종 붉은색 소나무로 수령은 약 300~400년쯤 되어 보인다. 밑둥에서 조금 위로 삼지창처럼 세 가지가 나서 자랐는데, 세 가지 모두 수세가 좋고 반듯하게 잘 자란 모습에 다들 감탄하여 삼지적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나무를 군유림으로 등록하였으며, 또 충남도 천연기념물로 충분히 선정이 될 가치가 있어 신청을 했다. 그러나 소유자(대천시 거주)에게 사용 승락을 받지 못해서 선정이 되지 못했다.
3. 천연기념물 지정
적송 소유주는 삼지적송이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면 문화재관리위원회에서 관리되는 부분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그 멋진 삼지적송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그것으로 인해 마을이 더 한마음으로 단합되고, 홍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 때문에 아직도 문화재청을 통해 방법을 타진 중이다.
4.삼지적송 제사(산신제)
지금은 마을 분들이 나무가 있는 곳으로부터 마을 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오고가며 한마음으로 매년 정월 보름에 제를 지낸다. 다행히 삼지적송 소유주가 마을에서 제를 지내는 것만은 막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앞쪽의 길을 넓히거나 하는 부분은 허락을 하지 않고 있다. 처음 제를 지낼 당시에는 나소열군정하에 제를 위한 지원금을 매년 100만원씩 지원받았다. 면에서는 천방산 해맞이행사와 겸하여 재물도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외부에서 참석해주시는 분들도 많이 계셔서 즐거운 마을의 연례행사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외부 지원 없이 마을 자력으로만 제를 지낸다.
제단은 세 사람(이재규, 신동권, 나)이 자비와 자력으로 나무 앞부분에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다. 현재 마을의 안녕과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금복리2구 마을 행사로 제를 지내고 있다.
5. 제사의 의미와 염원
이 제사는 미신이나 어떤 종교적 의미가 전혀 없다. 1987년 수해로 놀란 마을 주민들의 마음속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서로 화합할 수 있는 구심점으로 의미가 있다. 나아가 농사의 풍요, 타지에 나가있는 자녀들의 안전, 마을의 평안을 바라는 마을 분들의 순수한 공동체 의식으로 이어져가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2년은 쉬었다. 올해는 이전과 같이 마을 자비로 성의껏 제를 지낼 계획이다. 길과 주변을 조금 더 넓히고 가꾸어서 사물놀이도 하고, 함께 음식도 나누어 먹고, 금복리를 찾는 모든 분들과도 함께 즐길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제사를 마을의 축제와 마을의 구심점으로 만들고, 삼지적송을 치유의 나무로 만들어보고 싶다.
* 면담하는 내내 회관에 모여계신 어르신들은 함께 당신들의 생각과 기억들을 덧붙여 주셨다. 조사자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매우 즐거워하시는 모습에 평상시에도 좀 더 자주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복리 옥박골에 가끔 나를 불러 전을 부쳐주시고 풋호박이며 텃밭 푸성귀를 나눠주시던 친구 어머님이 사시던 빈 집이 있었다. 지금은 오래된 미래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갓 쓰고 도포 입고 생활하는 1962년생 훈장이 산다. 훈장은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옛 선비들의 운동법이라는 영선도인법을 시작으로 하루를 연다. 그곳은 그야말로 선비들의 생활방식을 여전히 잇는, 언뜻 보면 꽤나도 케케묵었을 것 같은 공자왈 맹자왈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그간 많은 제자들이 이곳을 거쳐 법조계, 의료계 등 다양한 곳에서 멋진 역할을 하고 있다.
서천으로 귀촌 후에는 뉴스서천에 ‘송우영의 고전산책’을 통해 공부에 대한 옛 성인들의 귀한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다. 문헌서원과 서천문화원에서도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있으며, 요즘사람들이 고전에 다가가기 쉽도록 해석하고 편집한 서책을 연 1권 이상 집필하고 있다. 또한, 텃밭의 차나무를 애지중지 돌보고, 누구라도 서당을 찾으면 따뜻한 차를 대접한다.
서천 어느 마을인들 아름답지 않은 곳 있으랴마는 특히 문산면 금복리 마을은 야트막한 산새가 병풍처럼 에둘러진 고운 마을로 산새들과 다람쥐가 마당을 함께 쓰는 상당히 그럴싸한 향리이다. 이쯤에서 한번쯤 일상을 떠나 나를 관조하는 마음으로 서당을 찾아 차 한 잔 대접받고 하늘 천 따지를 읽어 보는 것도 조금은 운치 있으리라 본다.
1887년 7월 28일 새벽 3시경, 주민 한 분이 전화를 주셔서 밖에 나가보니 집 밖이 온통 물바다였다. 전날 저녁부터 내리던 비가 새벽까지 그치지 않고 내렸는데, 그 양이 너무 많아 산사태가 나고 집들이 유실되면서 잠자던 주민들도 떠내려간 상황이었다. 어느새 하천과 논이 하나가 되고, 그 물 위를 온갖 유실물들이 덮고, 산자락이 뚝뚝 떨어져 나가고, 길 건너 마을의 집 여러 채가 떠내려간 모습에 너무 당황했다. 그래서 장정들이 나름대로 삽이며 톱이며 집에 있는 연장들을 들고 나가서 솔가지나 떠내려 오는 나무를 잡아내어 어떻게든 터진 곳들을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전봇대만한 나무가 뽑혀 하천 쪽으로 내려오고, 억수로 퍼부어대는 비에 황망하여 그만 손을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라도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비가 그칠 때까지 손을 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오전 8시가 넘도록 큰 비가 그칠 줄 모르고 내렸다.
2. 피해 상황
쇳골은 모두 쓸려내려 마을이 없어지고, 그나마 미리 피해서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안태, 노루지, 원당에서 모두 합쳐 다섯 명이 잘못 되었다. 가옥침수는 원댕이 완준씨네, 강선묵씨네 등 너덧 채 되었다.
그 당시 정해조씨가 이장이었고, 내가 새마을지도자였다. 나는 마을 분들의 사망신고를 도와주었다. 온 마을이 너무 침통한 분위기였다. 원진산 수풀이 제법 우거졌음에도 금복리에 집중해서 내린 폭우로 마을 전체가 피해를 보았다. 쇳골 위쪽에서부터 쓸려 내려온 토사와 부서진 나무들이 마을을 온통 뒤덮고, 원당 쪽 마을도 모두 휩쓸어 어디가 길인지 논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팡이를 짚어가며 건너 마을의 안부를 살피러 다니곤 했다.
3. 복구
거의 모든 길이 유실되어 사람이나 차가 드나들 수 없고, 의식주가 급한 주민들에게 헬기로 구호물품이 공급되어 나누어 쓰며 버티는 상황이었다. 피해상황이 너무 심각하여 복구작업이 어려울 것 같아 보이는 현실에서 당국과 주민들은 집단이주를 하려는 의견이 팽배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살아온 터전을 떠날 수 없다는 의지로 마을에 남기를 원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었다.
각 가정의 전, 답, 가옥, 등 피해사항이 조사돼 복구비용을 지원받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군인 등 도와주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마을을 치워나가기 시작했다. 마을 아낙들은 식사를 준비하는 등 마을주민 모두가 힘을 합쳐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전심을 다하며 어려움을 같이 나누었다.
복구비용을 모아 마을별로 공사업체를 섭외했다. 복구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세월도 많이 흐르고 주민간의 어려운 일들도 많았다. 그리고 토사로 덮여있던 전, 답을 정리하느라 주변마을보다 10년 정도 먼저 경지정리가 이루어졌다. 또한, 유실된 도로 및 길들을 정리하는 복구공사가 불과 2~3년 전까지 이어졌다. 당시 피해상황이 얼마나 컸고, 복구비용이 얼마나 소요되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한국은행과 자매 결연을 맺었는데, 이것은 마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 각 가정에 한 마리씩 새끼염소를 사주기도 했는데, 농사가 어려운 상황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새끼염소 한 마리 가격이 20만원 정도였다.
4. 회상
재해로 인해 농사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많은 주민들이 공장이나 공사판에 다녀서 자녀들을 가르치며 삶을 이어나갔다. 그러다보니 주변 마을보다 더 낙후된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마을을 떠나지 않고 서로 도우며 살아낸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 그리고 당시 가족을 잃었던 분들 앞에서는 수해 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늘 조심스럽다.
* 2011년 봄에 서울에서 이곳 금복리로 귀농 후 마을 분들과 친밀하게 지내다보니 서로 묻지 않는 여러 이야기들을 들려주셔서 그냥 흘려듣곤 했다. 그러다가 10년이 넘는 동안 반복해서 흘려듣던 많은 마을의 이야기들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처음에 기록을 위해 제보자께 면담을 요청 드렸을 때, 제보자는 기록의 목적과 그 결과물의 용도 등에 대해 궁금해 하셨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 말로 이해시켜드리기가 어려웠다. 그간 여러 매체의 인터뷰에 응한 경험이 많으셨지만, 그 결과물에 대한 피드백이 부족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재방문할 때는 이전에 작성한 마을기록 완성본과 책 등을 가지고 가서 보여드렸다. 제보자는 그것들을 읽어보시고 흔쾌히 좋은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해 주셨고, 이후에도 기록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나 자료들을 찾아서 연락을 주셨다.
제보자는 자신이 인터뷰한 내용이나 제공해 준 자료들이 정확하게 기록되었는지, 그 기록이 어디에 쓰이는지 등을 확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기록 작업에 무한한 책임감이 든다.
□ 구정렬 효부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저에게는 할머니이시죠. 그러니까 저는 효부의 큰 손자예요.
□ 효부의 출생지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서천군 마서면 장선리 대통뫼에서 출생하셨어요.
□ 효행의 대상은 어느 분이셨습니까? 할머니의 시아버지이셨어요. 저에게는 증조할아버지이시죠.
□ 효부비 건립 절차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먼저 향교 유림의 효행록과 효부 장문, 소문 등으로 알려졌어요. 이후 관내 서천향교와 유도회지부의 협조와 성균관에서 심의하여 통과한 이후에 비문 내용은 할머니의 이질인 김중각이 근찬근서하는 절차를 거쳐 1986년에 건립되었어요.
□ 효행의 주요 내용은 무엇입니까? 할머니께서 증조할아버지를 1944년부터 1951년까지 8년간 모셨지요. 집에서 시아버지를 모시면서 손수 자신이 보살펴드렸어요. 용변 자리를 갈아드리고, 머무시는 방을 청결히 해드리고, 식사 때마다 진지를 새로 지어 잡수시도록 직접 떠 드렸어요. 특히 시아버지가 미나리나물을 드시고 싶다고 하셨을 때 추운 겨울이지만, 미나리 재배 주인을 설득하여 얼음을 깨고 채취하여 반찬을 해드리는 등 효행을 하셨어요.
□ 효부비는 누가 세웠습니까? 향교, 유도회, 성균관의 협조와 함께 우리 자손들이 세웠어요. 우리 가족들이 건립비를 모으고 세웠어요.
□ 효부비가 태월리 마을회관 옆에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효부가 거주했던 동네이고, 마을회관은 마을의 중심이기 때문에 그 옆에 세웠지요.
□ 후손이 본받아야 할 정신은 무엇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세상이 많이 변했을지라도,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효는 모든 행동의 근본이라고 생각해요.
□ 효부비는 어디에서 관리하고 있습니까? 기관이나 단체의 지원이나 관리는 없고, 우리 후손들이 보존 관리하고 있어요.
□ 효행에 관련해서 상을 받거나 기록이 있습니까? 상을 받은 적은 없고요, 한국효문화자료보감에 실려 있어요.
□ 후손이 조상의 효행을 기리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명절 때 손주들이 집에 오면 효부비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효행의 내용 을 말해 주고 있어요. 효행을 알게 하는 아주 작은 실천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손주들이 집에 오면 당연히 다녀오는 것으로 생각하더라고요. 교육은 그래서 필요한 것 같아요. □ 효부비 보존 관리를 위해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입니까? 기회가 된다면 효부 비각을 설치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 조사자의 의견 : 효부비는 김중각이 글을 짓고 썼다. 그는 조사자 어머니의 외사촌 오빠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비인면 관리 통수뫼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하여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재직했다. 『모범한글서예』 등 글씨와 관련된 도서와 글씨본을 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보자도 김중각은 글씨를 잘 썼다는 말을 여러 번 증언했다.
28세에 반중매로 신랑을 만나 조금은 늦은 결혼을 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23~24세 이면 시집을 갔다. 친정아버지가 시집 안 간다고 화를 내시며 잔소리를 하셔서 결혼을 했다. 평소에는 “작은 공주” 하며 예뻐하셨는데, 시집갈 생각을 안 하니 화가 나고 속상하셨던 것 같다.
어느 날 시집을 안 갈 거면 일이라도 하라고 하시며 거래처 회사에 경리를 보라고 하셨다. 신랑이 운영하는 회사였다. 아버지는 취직을 계기로 신랑과 엮어 주려고 하셨던 거였다. 아버지는 믿음직하고 성실한 청년인 신랑이 무척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신랑이 이상형도 아니고 호감도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친해진 계기는 신문 십자말풀이를 하면서였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만났고 결혼하게 되었다. 그렇게 결혼생활은 시작되었고, 6년을 살다가 갑작스럽게 시어머니를 모시게 되어 신랑 고향인 이곳(장항?)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서울 토박이였지만 시골살이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터라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왔다.
- 시댁으로 들어가면서 어려웠던 점은 있었나요?
야행성이라 밤에 움직이고 아침에 늦게까지 자야 했는데, 시골의 삶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해서 적응할 때까지 힘들었다. 그것만 빼면 다른 것에 적응하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밭에 가서 “정구지”를 끊어 오라고 하셔서 알았다고 하고 밭에 갔는데, 정구지가 뭔지도 모르겠고 뭘 끊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옆집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부추를 베어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추의 방언인 정구지를 베어 오는 것을 끊어오라고 하니 알 수가 없었다.
- 시어머니 시집살이를 하셨나요?
시어머니가 신랑을 좋아하지 않았다. 첫째, 둘째 아들은 엄마의 말에 순응하는 효자였지만, 셋째인 신랑은 아니다. ‘어머님이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말하는 아들이다 보니 어려워하셨고, 덩달아 셋째 며느리 또한 어려워하셨던 것 같다. 그래도 시어머니는 “금은보화를 깔아줘도 셋째 아들과는 살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분이였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같이 사셨다.
남들이 생각하는 시집살이는 없었지만, 둘째 아주버님이 이혼하시면서 두 조카를 키웠다. 거기서 오는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상처도 받고 힘들었다. 갈등을 없애기 위해 일을 시작했고, 다행히 시어머니가 찬성하며 도와주셔서 더 이상 시집살이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8남매를 홀로 키워온 여성으로서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거라고 같은 여자로서 공감했으며, 그로인해 감수성이 발동된 것 같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삶을 존중해 드리며 서로 공존해 나아갔다.
시집살이라는 게 말하기 쉽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완전히 다른 삶으로 되면서 내 삶을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맞춰야 하는 것이고 맞추지 못하면 시집살이가 되는 것이고 맞추어 살면 시집살이가 내 삶에 들어와 시집살이라고 느끼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여성으로서 삶이 아직은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다른 이의 삶을 들여다보며 공감하며 서로 존중할 수 있도록 자기 목소리를 드러내는 일에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록내용
먼저, 그곳이 지금도 갈꽃비를 만들고 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 고살메 이장과 통화를 했고 현재 다섯 집 정도가 갈꽃비를 엮고 있고 본인도 갈꽃비에 대해 잘 아니, 아는 대로 얘기해 주겠다는 반가운 말씀을 듣고 약속을 잡아 만났다.
[고살메 마을 현종규 이장과의 면담내용]
조사자 : 이름과 출생년도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구술자 : 현종규, 56년생유.
조사자 : 고향이 어디이신가요?
구술자 : 고살메, 삼산3리 고살메 마을유. 여기서 태어나서 여기서 지금까지 살고 있슈.
조사자 : 그럼 이 마을에서 평생을 지내신 거네요? 타지에 나가신 적은 없으셨는지요?
구술자 : 왜요. 젊었을 때는 바깥에 나가서 이런 저런 일도 혀보긴 혔지만, 대부분 여기서 쭉 살았다고 봐야쥬.
조사자 : 지금까지 주로 무슨 일을 하셨어요?
구술자 : 농사도 짓고 빗자루도 만들고, 주로 농사짓쥬.
[ 갈대꽃비 제작에 대하여 ]
조사자 : 갈대꽃비는 몇 세부터 만드셨어요?
구술자 : 20대 때부터 만들었다고 봐야쥬.
조사자 : 갈대꽃비 만드는 것을 누구에게 배우셨어요?
구술자 : 따로 배우지는 않고 오며 가며 어른들 하는 걸 보고 배웠지 딱히 누가 가르쳐주고 혀든 안 혔슈. 집에 오면 으른[어른]들이 늘 하고 계싱게 어깨 너머로 보고 그대로 따라서 혔지 따로 배우고 그런 거 없었슈.
조사자 : 갈대꽃비는 어디서, 누구와 만드셨어요?
구술자 : 집에서 혔슈. 혼자서는 허기 힘들어유. 집사람이 도와줘야지. 방은 좁 아서 맬 수 없고, 헛간에 쌓아놓고 부부간에 밤에 매서 아침 일찍 팔러 갔슈. 집사람은 이고 팔러 댕기고 나는 어깨에 메고 다니고. 그때는 아줌마들은 머리에 잔뜩 이고 다녔고, 남자들은 어깨에 메고 팔러 나갔쥬.
조사자 : 갈대 채취는 어디서 했나요? 고살메에서 나는 갈대로 했나요? 여기가 신송리 갈대밭이 가까운데 거기 가서 채취했나요?
구술자 : 여기서 나기는 혀도 양이 부족했고, 또 여기 것은 질이 나뻐서 쓸 수 가 없슈. 대천천이나 갑천.
조사자 : 갑천요? 대전 갑천요?
구술자 : 야. 거기뿐이간디유, 고산천, 전주천, 보령댐 부근 사방간디 안 가는 디가 없슈. 심지어 강원도 까장[지]도 갔슈. 저기 경기도 임진강, 한탄강, 전라도, 영산강, 낙동강, 전국적으로 안 가는 곳이 없었슈. 8월에 갈대꽃 을 사러 댕기는디 그 지역 주민한테 갈대꽃 뽑아서 건조해 놓으라고 미리 주문을 해 놓으면, 그 사람들이 갈대꽃을 말려 놔유. 그러면 우리가 가서 사오는 거쥬.
조사자 : 그때는 자가용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운반해 왔나요?
구술자 : 화물트럭 대절혀서 가기도 허고 여기서 서천역까지 화물로 붙여오면, 인력거나 리어커, 경운기 끌고 가서나 받아오기도 하고 했슈.
조사자 : 갈대꽃비는 몇 월에 만드셨어요?
구술자 : 농삿일 다 마치면 농한기 때 혔슈. 긍게 11월에서 2월까장 노느니 빗자루 맷쥬. 농한기 때 좋은 부업이었응게. 그때는 집집마다 건진 다 허다 싶이 했슈.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에 우리 마을이 갈대꽃비 부업 단지로 지정을 받아서 갈대꽃 사도록 저리융자를 해줬슈. 우리 마을이 70호쯤 됐었는디 40호 이상이 빗자루를 만들었응게 경[굉]장혔쥬.
조사자 : 갈대꽃비 만드는 방법을 들려주세요. (비법?)
구술자 : 비법은 따로 없슈. 집집마다 부모네들이 다 하고 있응게 오며 가며 어깨 너머로 배운 거지 일부러 배우지도 않았구. 비법이니 그런 거 없슈. 지금은 플라스틱이랑 나이롱끈을 사용하지만, 그전이는 왕골을 절개해 서 자루 덮개 맨들고, 모시 사다 물들여서 끈으로 사용했슈.
조사자 : 갈대꽃비를 어떻게 파셨어요?
구술자 : 서천 그릇가게나 철물점에 도매로 넘기기도 하고. 군산, 익삭, 전주, 진 안, 홍성, 정읍 시장 안 철물점에 갔다줘유. 서천시장에 빗자루점이 있기도 했구. 주로 새벽에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남자들은 어깨에 메고 충남권허구 전북권으로 팔러다녔슈. 아침 일찍 계동으로 나가서 장항 도선장에 가서 군산으로 너머가서 군산 시장에 넘기기도 하고, 집집마다 댕기면서 팔기도 하고. 군산서는 시내서는 잘 안 팔려유 시내 바깥티, 외곽으로 댕겨야 잘 팔렸슈. 군산터미널에서 전주로도 가도, 진안으로도 가고 주로 외지로 돌아댕기면서 팔았슈.
조사자 : 그렇게 다니시면 점심은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셨나요?
구술자 : 도시락 못 들고 다녀유. 빗자루가 20자루씩 짊어지고 가는디 도시락을 어떻게 들고 다녀유. 다니다가 시장 국밥집서 사먹기도 하고, 빵 사먹기도 혔쥬.
조사자 : 한 해에 몇 개나 만드셨나요?
구술자 : 1년이면 한 500자루 정도 만들었다고 봐야쥬. 금년이는 날이 너무 뜨거워서 갈밭이 상혀서 그전보담 반절밖에는 수확이 안 돼서 어쩔는지 모르겠네유.
조사자 : 지금도 만드는 집이 있나요?
구술자 : 현재 5가구가 하고 있슈.
조사자 : 갈대꽃비를 언제까지 만드셨어요?
구술자 : 현재까지도 허구 있슈.
조사자 : 갈때꽃비를 만들어서 팔 때를 생각하면, 가장 기억나는 일은 무엇인가 요?
구술자 : 대체로 잘 팔고 돌아오는디, 어떨 땐 아침새벽에 10자루나 20자루 지 고 나가서 하루 종일 팔러 댕겼는디, 다 못 팔고 돌아올 때, 5자루나 밖 에 못 팔 때가 젤 힘들었쥬. 발걸음이 무거워서 집에 오기 싫어유. 그거를 팔아야 애들 기성회비도 주고 육성회비도 주고 반찬도 사먹고 애들 옷도 사주고 양말도 사주고 간식도 사주고 월사금도 내고 혀야는디, 빈 손으로 들어오려면 발걸음이 안 떨어지쥬. 애들은 호야등불 들고 계동까지 마중 나와유. 뭐라도 사올 줄 알고 기다리는 거쥬. 애들이랑 식구들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못 팔았을 때는 짐을 다른 집에다 맽겨놓고 와유. 그때가 젤 안 좋았슈.
사진
<사진 3. 갈꽃비체험관에 전시된 갈꽃비>
기록개요
생산자료
생산 자료 : 사진 8점, 동영상 1개(1분 16초)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조사자가 어렸을 때(1970년대) 장항 장날이면 갈대로 만들었다는 커다란 빗자루를 한 묶음 등에 지고 팔러 나왔던 먼 친적 아주머니가 계셨다. ‘고살메’에서 오시는 분이셨다. 쪽진 머리에 몸집도 작으셨는데, 빗자루 뭉치로 뒤덮이다 싶이 들어서는 모습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저녁 늦게까지 빗자루를 팔러 다니시다가 우리집에서 주무시고 가시곤 했었다.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으셨던 그분의 소식이 궁금했고, 그분의 어깨에 늘 매여있던 빗자루. 일반 빗자루 보다 훨씬 컸고, 쓱쓱 잘 쓸어졌던 그 빗자루가 지금도 고살메에서 만들고 있는지 궁금했다. 고살메를 찾았을 때, 그 분은 오래전에 이사 가셨다고 했다. 그 빗자루는 ‘갈꽃비’라는 이름의 갈대로 엮어 만든 빗자루였고, 지금도 만드는 집이 있다고 했다.
점점 사라져 가는 ‘갈꽃비’에 대해 기록을 남겨두고 싶어 고살메를 찾았고 마을 이장님의 도움으로 ‘갈꽃비’를 만들고 계시는 ‘김종덕’님을 소개받았다.
[고살메 마을 김종덕님과의 면담내용]
조사자 : 이름과 출생년도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구술자 : 김종덕이구유, 74세(49년생)유.
조사자 : 고향이 어디이신가요?
구술자 : 고살메.
조사자 : 이 마을에 사신 지가 얼마나 되세요?
구술자 : 군대 갔다 와서 나가서 좀 어디 먹고살 것 없나 돌아대니다가 일루 들왔슈, 어머니가 혼자 계셔 가지구, 우리 내외가 나가 있어서 두 집 살림하기가 먹고 살기도 그렇고 혀서 고향으로 들어와서 농사짓고, 다른 사람들이 하니께 이것도(갈꽃비 만드는 일) 허구.
조사자 : 지금까지 주로 무슨 일을 하셨어요?
구술자 : 주로 농사짓쥬.
조사자 : 농사는 주로 무슨 농사를 지으셨나요?
구술자 : 벼농사유, 밭이 없어가지구.
[ 갈대꽃비 제작에 대하여 ]
조사자 : 갈대꽃비는 몇 세부터 만드셨어요?
구술자 : 으른들 하는 거 군대 가기 전이도 봤쥬, 어깨너머로 쳐다보고 혔는디, 군대 갔다 와서는 많이 혔쥬.
조사자 : 그러면 20대 후반쯤에 하셨겠네요?
구술자 : 군대 가기 전이도 허긴 혔슈. 20대 전이도 시간 있으믄 혔슈. 그땐 애들인게 지 맘대루 허구 싶으믄 허구, 허기 싫으면 않구. 군대 갔다 와서는 많이 혔쥬.
조사자 : 갈대꽃비 만드는 방법은 부모님에게 배우셨나요?
구술자 : 배우고 말구 헐 것두 없슈. 으른들 허는 거 어깨 너머로 보고, 그때 당시 그냥 또 되대유.
조사자 : 그때도 이런 장비가 있었나요?
구술자 : 그때는 코를 안 떳슈. 그때는 이것(코)을 안 떠줬어.
조사자 : 갈대꽃비는 어디서, 누구와 만드셨어요?
구술자 : 혼자 이렇게 집에서 혀유.
조사자 : 주로 부부가 함께 하셨다고 하던데, 아주머니께선 함께 하시지 않으셨나요?
구술자 : 집사람은 일체 안 거들었어유. 집안일허구 농삿일 허기도 바쁜게.
조사자 : 갈대채취는 어디서 했나요?
구술자 : 갈대꽃은 팔월이 질 더울 때 따야유, 8월달이, 8월초에 질(제일) 더울 때 따서, 말려서, 껍데기 빼서 말려놔유. 주로 많이 가져온 것은, 저기, 전라도 그어디냐 영산강이서 사 왔슈, 그기가 갈대가 많이 나구 갈대가 질이 조았슈. 강원도서도 사오는디 강원도는 굵고 잘 부서져유. 완주 고산서도 가져왔슈.
조사자 : 운반은 어떻게 하셨나요? 차를 대절해서 갔나요?
구술자 : 아니유. 거기 가서나 5톤 트럭 빌려서 싣고 와서나 집집이 다 나눴슈.
조사자 : 아, 그러셨군요. 개개인이 구매한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구매해서 가져오면 나누신 거네요?
구술자 : 개인이 사러가는 사람도 있었구, 우리는 거기서 싣고 오면 나눴쥬.
조사자 : 갈대꽃비는 몇 월에 만드셨어요?
구술자 : 딱히 때는 없는디, 인자 누가 매달라고 하면 매줫슈 농사철이는 허들 못 허구 바쁘니께. 농사철 지나믄 혔쥬. 그것두 한겨울이는 춰서 못허구. 먼지가 많이 나유.
조사자 : 갈대꽃비 만드는 방법을 들려주세요. (비법?)
구술자 : 방법이랄 게 따로 없구. 빗자루 매면서 이렇게 하믄 좋것다 싶으면 바꿔보고, 이쁘게 매면 좋잖유. (웃음) 코도 예전이는 안 혔슈.
조사자 : 갈대꽃비를 어떻게 파셨어요?
구술자 : 서천장이 나가서 있으믄 장사들이 사러와유. 그럼 그사람들헌티 넘겼슈.
조사자 : 도매로 넘기셨겠네요? 비를 매고 팔러 다니지는 않으셨나요?
구술자 : 나는 그러지는 않았슈. 장사들한티 넘겼지.
조사자 : 한 해에 몇 개나 만드셨나요?
구술자 : 한 해에 한 800개나 900쯤 맨들었쥬.
조사자 : 지금도 만드는 집이 있나요?
구술자 : 그 전이는 거진 다 맨들었는디 지금은 이걸(갈대꽃) 사기가 어려워서 점점 없어지구 지금은 두집이서만 혀유. 우리 집하구 저짝에 한 집. 수입(갈대꽃)도 있는디 수입은 못 써유. 금방 빠지고 부서지고 눈으로 봐두 차이가 나유. 그리구 우리야 마냥 부드럽지가 안 혀유. 뻣뻣혀서 마당이나 시멘트바닥 같은 디나 쓸 수 있슈.
조사자 : 갈대꽃비를 언제까지 만드실 것 같으세요?
구술자 : 이것(갈대꽃)만 구할 수 있으믄 힘닿는 디까지 헐수 있쥬. 이것두 여간 힘이 드는게 아녀유 손도 많이 가구 먼지도 많구. 더 늙으믄 허기 어려울 꺼유. 그려도 손 놓고 있을 순 없쟎유. 몸 쓸수 있을 때까장 혀 보는 거쥬. 이것두 없어지기 전이 나라에서 문화재로 지정혀 주문 좋을 틴디.
조사자 : 갈때꽃비를 만들어서 팔 때를 생각하면, 가장 기억 나는 일은 무엇인가요?
구술자 : 딱히 특별한 일이 없슈. 그냥 맹글구 여기저기서 주문 들어와서 통장에 입금된 거 보믄 좋구(웃음).
사진
기록개요
생산자료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제보자는 시초면에서 태어나 문산면으로 시집왔다. 결혼 후 농사일을 하며 자식들 키우고 바쁘게 살아오면서, 어릴 적 친정어머니께서 하셨던 전통 장 담그기를 이어왔다. 최근에는 시간이 적게 걸리는 간단한 고추장 담그기를 해서 형제들과 자식들에게도 나눠준다.
■ 고추장을 전통방식으로 담가 오다가 간단하게 만들게 된 이유
문산면으로 시집와서 55년을 넘게 살아왔다. 살면서 아이들 돌보고, 집안 일 하고, 농사일을 했다. 일이 점점 많아져서 지치고 힘들었다. 식구들이 많으니 장도 빨리 없어지고 특히 고추장은 더 빨리 없어져서 많이 만들어 놓았다. 한 번 만들기 시작하면 3일 꼬박 걸리는 일이라서 힘들었다. 찹쌀가루에 엿기름을 섞어 가마솥에 끓여 조청을 만들어야 했고, 고춧가루와 메줏가루를 넣고 했다. 그러나 간단하게 담그는 방법을 알게 된 뒤로는 지금까지 그렇게 담그고 있는데 먹을 만한 맛이다.
■ 전통 방법을 응용하여 현대식 고추장 담그기
재료: 고춧가루 8kg, 찹쌀가루5kg, 엿기름 5kg, 미소된장 3kg, 물, 설탕, 소금
순서:
1. 엿기름을 물에 불려 고운 거름망에 걸러낸다.
2. 걸러낸 엿기름물을 솥에 넣고 불을 지핀다.
3. 서서히 불을 올리다가 찹쌀가루를 풀어준다.
4. 찹쌀가루가 눌러 붙지 않게 불을 줄이고 계속 저어준다.
5. 저어 줄때는 나무 주걱을 사용하며, 올라오는 불순물을 제거한다.
6. 찹쌀가루가 물에 동동 떠오르면(찹쌀가루가 삭음), 불을 매우 약하게 줄이고 조려주기 시작한다.
(약 6시간 정도는 지켜보지 않아도 됨)
7. 조청보다 조금 묽게 되면 불을 끄고 식혀준다.
8. 완전히 식으면 미소된장을 넣고 섞어준다.
9. 곱게 갈아온 고춧가루를 섞어준다.
10. 소금으로 간을 하고 설탕으로 기호에 맞게 단맛을 조절한다.
11. 농도는 소금물을 끓여 식혀서 맞춘다.
12. 덩어리가 생기지 않도록 잘 비벼준다.
13. 시동생, 시누, 아들 등 나눠주기 위해서 중간 통에 담는다.
■ 현대식 고추장 담그기의 좋은 점
제보자의 말 : 메주가루를 사용하면 가루가 삭을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기호에 따라 6개월 정도 걸린다. 숙성이 되면 맛있는 된장이 되지만, 농사일에 아이들 키우기도 바쁘고 많은 식구들에게 나눠주려면, 바로 먹을 수 있는 나만의 고추장 담그기가 좋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고추장을 담그는지 모르지만, 바쁘게 살면서 나만의 고추장 담그기를 귀농한 도시 사람들에게도 전수하고 있다.
사진
<엿기름을 물에 불려 고운 거름망에 걸러냄>
<엿기름을 삭히면서 올라오는 불순물을 제거한다.>
<찹쌀가루를 넣고 천천히 저어준다. 가루가 올라올 때까지 저어준다.>
<졸여지기 시작하면 불을 약하게 줄이고 졸여준다.>
<조청보다 조금 묽게 졸여준다.>
<완성된 조청물에 미소된장, 고운 고춧가루, 소금, 설탕을 넣고 잘 섞어준다.>
<완성된 고추장>
기록개요
생산자료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서천에서 태어난 제보자(여성)는 재래식 고추장 담그기를 이어왔다.
■ 재래식으로 고추장 담그기
재료: 고춧가루 8kg, 찹쌀가루 5kg, 엿기름 5kg, 메줏가루 3kg, 설탕, 소금
순서:
1. 엿기름을 물에 불려 고운 거름망에 걸러낸다.
2. 걸러낸 엿기름물을 가마솥에 넣고 불을 땐다.
3. 서서히 불을 올리다 찹쌀가루를 풀어준다.
4. 찹쌀가루가 눌러 붙지 않게 불을 줄이고, 나무 주걱으로 계속 저어준다.
5. 찹쌀가루가 물에 동동 떠오르면 불을 아주 작게 줄이고, 조려주기 시작한다.
6. 조청보다 조금 묽게 조려지면, 불을 끄고 완전히 식힌다.
7. 곱게 갈아온 고춧가루와 메줏가루를 넣고 저어준다.
8. 소금으로 간을 하고 설탕으로 기호에 맞게 단맛을 조절한다.
9. 농도는 끓인 소금물을 식힌 후에 넣어서 조절한다.
10. 덩어리가 생기지 않도록 잘 비벼주고 항아리에 담는다.
사진
기록개요
생산자료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Q. 인터뷰 참여자 자기소개
서울 신길동에서 태어났다. 세 자매 집안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적 꿈은 글을 쓰는 작가였지만, 아동미술교육학을 전공하고 서양화를 전공하면서 서양화가의 길을 걸어왔다. 뒤늦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Q. 현재, 귀촌에 관한 이야기
미술협회 서천지부 소속으로 옮긴 일이 예술 활동을 하려는 마음으로 전입신고와 함께 제일 먼저 한 일이다. 남편이 귀농 2호가 되었고 땅값이 싸서인지 귀농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귀농인들을 끌어들이는지도 모른다. 마을에서 주민자치 위원회 청소년교육분과에서 일을 한다. 농사를 짓고 수확하는 재미도 느낀다. 눈에 보이는 잡초들, 눈에 보이는 수확의 기쁨이 크다. 만 3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 그림을 그린 것은 몇 편 안 된다.
Q. 내가 기억하는 과거 장소와 마을 주변 이야기
그림을 그릴 때 소재를 찾기 위해 시골 풍경을 촬영하러 다닌다. 초가집, 멋진 나무, 물레방아 등 시골스러운 곳을 찾아 다녔는데 귀농해보니 초가집은 거의 볼 수도 없고 새로 지은 집들이 주를 이루다 보니 내 생각과 시골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Q. 귀촌하기까지 관련해서 개인의 추억, 기억하는 이야기
서울토박이로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데 남편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허리 통증에 시달려 명예퇴직을 결정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벗어나본 적이 거의 없는데 전국에 땅을 보러 다녔다. 강원도 영월 쪽으로 가던 중 산에서 굴러 내려오는 돌에 자동차 앞 유리가 깨지기도 하면서 2년을 돌아 다녔다. 어릴 때 춘장대 해수욕장에 간 추억이 있어서 내려왔다가 서천에서 가장 싼 땅이 문산면 구동리라는 말을 들었다. 부여와 더 가까운 마을이다 보니 땅값이 싸고 가축을 대량으로 키우는 곳도 없어 공기도 맑다. 구동리를 돌다가 경치 좋은 곳이 있어서 담장 너머로 머리만 내민 마을 주민에게 땅이 있는지 물으니, “내 땅 살라우?” 해서 지금의 터전에서 살면서 이 마을과 좋은 인연이 되었다. 땅값이 싸서인지 귀농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마을이다. 주변 마을에는 귀농인이 거의 없는데, 이 마을이 귀농인들을 끌어들이는지도 모른다.
땅을 계약하고 나서 온라인 다음 카페에 가입했다. 귀농인 모임이었다. 판교 띠울마을이 운영하는 카페였다. 그때 회원들이 모여 귀농인을 위한 서천귀농센터가 만들어지고 협회도 만들어 졌다. 군에서 폐교를 리모델링해서 귀농인들이 정착하기까지 지원해주고 있다.
Q. 내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특별한 곳과 혹은 나만의 힐링 공간
집 뒤에 소나무 숲이 있다. 우리 땅이다. 마을에서는 ‘중뜸’이라고 부르는데, 하루에 한 번쯤은 산에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며 넓은 숨을 쉬어 본다. 그곳에서 미래 계획도 세우며 숲을 돌본다.
Q. 예술활동과 관련해 들려주고 싶은 과거나 현재의 이야기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는 어디에 공모전이 있는지 알아보고 급하게 서둘러 작품을 출품하던 일이 종종 있었다. 상을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귀농 후 그림전시나 상을 받는 일에 관심이 없다.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Q. 귀촌 후 서천에서 살아오시면서 예술과 삶의 조화로움에 관해
귀촌 예술인 경우 전업으로 예술활동을 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대부분 생활인으로서 지역에서 생활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 예술활동을 이어가는 것 같다. 도시에서 살 때는 공모전이나 그림을 생활의 부속품으로 여겼던 것 같은데 귀촌 후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같이 작업해 나가는 설치 예술이 적합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의 가치관이 바뀌었다. 도시에서는 예술에 대한 사회적 욕망이 컸다면, 귀촌 후에는 순수한 나의 욕망으로 살아가는 일이 너무 행복하다. 그림전시 활동에 치우치기보다는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더 좋다. 어르신을 위한 돌봄 관련 생활지원사 아르바이트로 만들기, 그리기 등을 하고 있다.
Q. 지금 활동하고 계시는 작업 소개
지금까지 구상, 반구상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 앞으로는 자연물을 이용한 설치 미술, 목공예도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려고 한다.
Q. 귀촌 후 마을 활동을 한 동기와 과정 지금까지 이야기
마을기록활동가로서 마을만들기 기초자료수집 일을 아르바이트로 했다. 인터뷰를 2년간 진행하면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을 만들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지금은 마을에 크고 작은 일들을 하면서 행복하다. 원 주민들이 ‘좋은 사람이 우리 마을에 왔다’고 고마움을 표현할 때에 큰 보람을 느낀다.
마을 부녀회 총무 활동을 하고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역량으로 마을 공동체와 같이 하는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특강 강사로 책을 읽고 독후감상화를 그리는 일을 하면서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 사실 도시에서는 내게까지 올 차례가 없다. 전전긍긍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조바심이 컸다. 지역에서 나를 찾아주는 일이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해준 셈이다.
충남대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도 되면서 서천 지역 화가를 지지해 줄 수도 있고 내가 설 자리를 만나니 기쁜 일이기도 하다. 귀촌함으로 얻는 만족감이 높다.
Q.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생활철학 또는 예술세계
마음이 편하면 몸도 건강하다는 생활 철학으로 살아간다. 예술세계라기 보다는 현실에 적합하게 미술학원 등을 운영하면서 하나의 스펙으로 기능했던 것 같다. 생활을 위한 예술이고, 그림 그리기는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연습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보니 돈을 버는 도구에 그쳤다. 호기심이 많다보니 필요로 하는 많은 것들에 관한 공부를 해서 자격증을 따고는 했는데, 그 쓸모가 적절하게 발휘되고 있다.
Q. 개인적으로 문화예술활동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나
마을에서 주민자치회 청소년분과 일을 하고 있다. 청소년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갖고 청소년들과 마을 환경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을 환경 변화에 앞장서고 싶다. 문화예술활동은 마을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이루어내는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며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Q. 특별히 기대하고 있는 문화예술활동
우리 집 뒤에 산이 있는데 소나무, 진달래, 대나무 등이 있어서 틈나는 대로 잘 가꾸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과 나무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간단한 소품들을 만들어 보거나 대나무, 소나무 등 자연물 그대로를 이용하여 자연설치미술 체험학습장으로서 자연미술관을 만들고 싶다. 능력이 된다면 자연물을 이용하여 간단한 소품을 제작하고, 치매예방미술 치료사로서 활동을 위한 미술재료도 만들어 보고 싶다.
Q. 서천 지역과 지역민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
서천은 공기 맑은 곳, 아직은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지역이다. ‘서천에 산다’라는 작은 동아리에 가입했다.
Q. 앞으로 기대와 계획
농사를 조금씩 짓고 있는데, 우리 주 생산물은 고사리다. 중뜸에 고사리 천지다. 4,5월은 고사리 따는 일로 바쁜데, 연 300만원 수입원이다. 그게 우리 연봉이고 꾸준하게 하는 일이며 기쁨을 주는 일이다. 이게 지속하기를 기대한다.
자연미술관을 만들어 학생들과 소외된 노인 분들과 소통하며 살기 좋은 행복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고 싶다. 중뜸에 만들어질 오두막과 협업으로 만들어가는 설치물로 자연미술관 체험학습장이 만들어지면, 학습장을 보러 사람들이 우리 마을로 모여드는 기대감으로 꿈을 꾼다.
Q. 인터뷰이로서 마무리로 하고 싶은 이야기
서천은 전체 인구수에 비해 아이들이 너무 적다. 문산면만 하더라도 초등학교 학생이 20명 정도다. 분교이지만 초등학교가 폐교되면 문산면은 초토화될 것이다. 학교 살리기를 위한 마을공동체의 노력에 힘을 쏟고 아이들이 늘어나는 서천을 만드는 데 힘을 모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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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개요
생산자료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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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내용
제보자 조문제(남성, 1945년생, 현 금복2리 이장)의 구술을 정리했다.
1. 발견
오래도록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 묻혀있어서 아무도 몰랐던 나무가2006년 원진산자락의 임도를 개통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은곡리에서 판교리 쪽 고개 밑으로 임도를 연결하려는 공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금복리 산13번지에서 삼지적송이 발견되었다. 임도가 그곳을 가로질러 가야하는데 소유자의 불허로 방향을 쇳골로 틀어서 한 바퀴 돌아서 연결되었다. 계획이 변경되어 만들어진 현재의 임도가 너무 험한 편이라 다니기에 불편하다. 그러나 조상묘소가 있다는 이유로 소유자가 허락을 하지 않아 길을 낼 수 없는 상황이다.
2. 보호수로 자리매김
임도공사 중 발견된 소나무는 재래종 붉은색 소나무로 수령은 약 300~400년쯤 되어 보인다. 밑둥에서 조금 위로 삼지창처럼 세 가지가 나서 자랐는데, 세 가지 모두 수세가 좋고 반듯하게 잘 자란 모습에 다들 감탄하여 삼지적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나무를 군유림으로 등록하였으며, 또 충남도 천연기념물로 충분히 선정이 될 가치가 있어 신청을 했다. 그러나 소유자(대천시 거주)에게 사용 승락을 받지 못해서 선정이 되지 못했다.
3. 천연기념물 지정
적송 소유주는 삼지적송이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면 문화재관리위원회에서 관리되는 부분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그 멋진 삼지적송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그것으로 인해 마을이 더 한마음으로 단합되고, 홍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 때문에 아직도 문화재청을 통해 방법을 타진 중이다.
4.삼지적송 제사(산신제)
지금은 마을 분들이 나무가 있는 곳으로부터 마을 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오고가며 한마음으로 매년 정월 보름에 제를 지낸다. 다행히 삼지적송 소유주가 마을에서 제를 지내는 것만은 막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앞쪽의 길을 넓히거나 하는 부분은 허락을 하지 않고 있다. 처음 제를 지낼 당시에는 나소열군정하에 제를 위한 지원금을 매년 100만원씩 지원받았다. 면에서는 천방산 해맞이행사와 겸하여 재물도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외부에서 참석해주시는 분들도 많이 계셔서 즐거운 마을의 연례행사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외부 지원 없이 마을 자력으로만 제를 지낸다.
제단은 세 사람(이재규, 신동권, 나)이 자비와 자력으로 나무 앞부분에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다. 현재 마을의 안녕과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금복리2구 마을 행사로 제를 지내고 있다.
5. 제사의 의미와 염원
이 제사는 미신이나 어떤 종교적 의미가 전혀 없다. 1987년 수해로 놀란 마을 주민들의 마음속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서로 화합할 수 있는 구심점으로 의미가 있다. 나아가 농사의 풍요, 타지에 나가있는 자녀들의 안전, 마을의 평안을 바라는 마을 분들의 순수한 공동체 의식으로 이어져가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2년은 쉬었다. 올해는 이전과 같이 마을 자비로 성의껏 제를 지낼 계획이다. 길과 주변을 조금 더 넓히고 가꾸어서 사물놀이도 하고, 함께 음식도 나누어 먹고, 금복리를 찾는 모든 분들과도 함께 즐길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제사를 마을의 축제와 마을의 구심점으로 만들고, 삼지적송을 치유의 나무로 만들어보고 싶다.
* 면담하는 내내 회관에 모여계신 어르신들은 함께 당신들의 생각과 기억들을 덧붙여 주셨다. 조사자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매우 즐거워하시는 모습에 평상시에도 좀 더 자주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기록개요
생산자료
생산 자료 : 녹음 파일(20분 24초), 사진 2장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금복리에는 서당이 있다.
가끔, 종종 그곳에 가고 싶다.
금복리 옥박골에 가끔 나를 불러 전을 부쳐주시고 풋호박이며 텃밭 푸성귀를 나눠주시던 친구 어머님이 사시던 빈 집이 있었다. 지금은 오래된 미래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갓 쓰고 도포 입고 생활하는 1962년생 훈장이 산다. 훈장은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옛 선비들의 운동법이라는 영선도인법을 시작으로 하루를 연다. 그곳은 그야말로 선비들의 생활방식을 여전히 잇는, 언뜻 보면 꽤나도 케케묵었을 것 같은 공자왈 맹자왈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그간 많은 제자들이 이곳을 거쳐 법조계, 의료계 등 다양한 곳에서 멋진 역할을 하고 있다.
서천으로 귀촌 후에는 뉴스서천에 ‘송우영의 고전산책’을 통해 공부에 대한 옛 성인들의 귀한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다. 문헌서원과 서천문화원에서도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있으며, 요즘사람들이 고전에 다가가기 쉽도록 해석하고 편집한 서책을 연 1권 이상 집필하고 있다. 또한, 텃밭의 차나무를 애지중지 돌보고, 누구라도 서당을 찾으면 따뜻한 차를 대접한다.
서천 어느 마을인들 아름답지 않은 곳 있으랴마는 특히 문산면 금복리 마을은 야트막한 산새가 병풍처럼 에둘러진 고운 마을로 산새들과 다람쥐가 마당을 함께 쓰는 상당히 그럴싸한 향리이다. 이쯤에서 한번쯤 일상을 떠나 나를 관조하는 마음으로 서당을 찾아 차 한 잔 대접받고 하늘 천 따지를 읽어 보는 것도 조금은 운치 있으리라 본다.
<금복리> -우농
금복리여화金福里如畵
금복리는 그림 같은 마을
금복리입화도중金福里入畵道中
화중금복리우시畵中金福里遇詩
래금복리삼성유來金福里三聲濡
금복리람불변정金福里濫不變情
금복리 가는 길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림 속에 금복리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시 만난다.
금복리에 오면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에 푹 젖는다.
금복리에는 늘 변함없는 마을사람들의 정이 넘친다.
사진
기록개요
생산자료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제보자인 조문제(금복2리 이장), 구자연 부부의 구술을 정리했다.
1. 집중호우
1887년 7월 28일 새벽 3시경, 주민 한 분이 전화를 주셔서 밖에 나가보니 집 밖이 온통 물바다였다. 전날 저녁부터 내리던 비가 새벽까지 그치지 않고 내렸는데, 그 양이 너무 많아 산사태가 나고 집들이 유실되면서 잠자던 주민들도 떠내려간 상황이었다. 어느새 하천과 논이 하나가 되고, 그 물 위를 온갖 유실물들이 덮고, 산자락이 뚝뚝 떨어져 나가고, 길 건너 마을의 집 여러 채가 떠내려간 모습에 너무 당황했다. 그래서 장정들이 나름대로 삽이며 톱이며 집에 있는 연장들을 들고 나가서 솔가지나 떠내려 오는 나무를 잡아내어 어떻게든 터진 곳들을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전봇대만한 나무가 뽑혀 하천 쪽으로 내려오고, 억수로 퍼부어대는 비에 황망하여 그만 손을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라도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비가 그칠 때까지 손을 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오전 8시가 넘도록 큰 비가 그칠 줄 모르고 내렸다.
2. 피해 상황
쇳골은 모두 쓸려내려 마을이 없어지고, 그나마 미리 피해서 인명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안태, 노루지, 원당에서 모두 합쳐 다섯 명이 잘못 되었다. 가옥침수는 원댕이 완준씨네, 강선묵씨네 등 너덧 채 되었다.
그 당시 정해조씨가 이장이었고, 내가 새마을지도자였다. 나는 마을 분들의 사망신고를 도와주었다. 온 마을이 너무 침통한 분위기였다. 원진산 수풀이 제법 우거졌음에도 금복리에 집중해서 내린 폭우로 마을 전체가 피해를 보았다. 쇳골 위쪽에서부터 쓸려 내려온 토사와 부서진 나무들이 마을을 온통 뒤덮고, 원당 쪽 마을도 모두 휩쓸어 어디가 길인지 논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팡이를 짚어가며 건너 마을의 안부를 살피러 다니곤 했다.
3. 복구
거의 모든 길이 유실되어 사람이나 차가 드나들 수 없고, 의식주가 급한 주민들에게 헬기로 구호물품이 공급되어 나누어 쓰며 버티는 상황이었다. 피해상황이 너무 심각하여 복구작업이 어려울 것 같아 보이는 현실에서 당국과 주민들은 집단이주를 하려는 의견이 팽배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살아온 터전을 떠날 수 없다는 의지로 마을에 남기를 원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었다.
각 가정의 전, 답, 가옥, 등 피해사항이 조사돼 복구비용을 지원받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군인 등 도와주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마을을 치워나가기 시작했다. 마을 아낙들은 식사를 준비하는 등 마을주민 모두가 힘을 합쳐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전심을 다하며 어려움을 같이 나누었다.
복구비용을 모아 마을별로 공사업체를 섭외했다. 복구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세월도 많이 흐르고 주민간의 어려운 일들도 많았다. 그리고 토사로 덮여있던 전, 답을 정리하느라 주변마을보다 10년 정도 먼저 경지정리가 이루어졌다. 또한, 유실된 도로 및 길들을 정리하는 복구공사가 불과 2~3년 전까지 이어졌다. 당시 피해상황이 얼마나 컸고, 복구비용이 얼마나 소요되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한국은행과 자매 결연을 맺었는데, 이것은 마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 각 가정에 한 마리씩 새끼염소를 사주기도 했는데, 농사가 어려운 상황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새끼염소 한 마리 가격이 20만원 정도였다.
4. 회상
재해로 인해 농사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많은 주민들이 공장이나 공사판에 다녀서 자녀들을 가르치며 삶을 이어나갔다. 그러다보니 주변 마을보다 더 낙후된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마을을 떠나지 않고 서로 도우며 살아낸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 그리고 당시 가족을 잃었던 분들 앞에서는 수해 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늘 조심스럽다.
* 2011년 봄에 서울에서 이곳 금복리로 귀농 후 마을 분들과 친밀하게 지내다보니 서로 묻지 않는 여러 이야기들을 들려주셔서 그냥 흘려듣곤 했다. 그러다가 10년이 넘는 동안 반복해서 흘려듣던 많은 마을의 이야기들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처음에 기록을 위해 제보자께 면담을 요청 드렸을 때, 제보자는 기록의 목적과 그 결과물의 용도 등에 대해 궁금해 하셨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 말로 이해시켜드리기가 어려웠다. 그간 여러 매체의 인터뷰에 응한 경험이 많으셨지만, 그 결과물에 대한 피드백이 부족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재방문할 때는 이전에 작성한 마을기록 완성본과 책 등을 가지고 가서 보여드렸다. 제보자는 그것들을 읽어보시고 흔쾌히 좋은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해 주셨고, 이후에도 기록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나 자료들을 찾아서 연락을 주셨다.
제보자는 자신이 인터뷰한 내용이나 제공해 준 자료들이 정확하게 기록되었는지, 그 기록이 어디에 쓰이는지 등을 확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기록 작업에 무한한 책임감이 든다.
사진
기록개요
생산자료
생산 자료 : 녹음 파일(37분), 사진 1장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 구정렬 효부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저에게는 할머니이시죠. 그러니까 저는 효부의 큰 손자예요.
□ 효부의 출생지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서천군 마서면 장선리 대통뫼에서 출생하셨어요.
□ 효행의 대상은 어느 분이셨습니까?
할머니의 시아버지이셨어요. 저에게는 증조할아버지이시죠.
□ 효부비 건립 절차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먼저 향교 유림의 효행록과 효부 장문, 소문 등으로 알려졌어요. 이후 관내 서천향교와 유도회지부의 협조와 성균관에서 심의하여 통과한 이후에 비문 내용은 할머니의 이질인 김중각이 근찬근서하는 절차를 거쳐 1986년에 건립되었어요.
□ 효행의 주요 내용은 무엇입니까?
할머니께서 증조할아버지를 1944년부터 1951년까지 8년간 모셨지요. 집에서 시아버지를 모시면서 손수 자신이 보살펴드렸어요. 용변 자리를 갈아드리고, 머무시는 방을 청결히 해드리고, 식사 때마다 진지를 새로 지어 잡수시도록 직접 떠 드렸어요. 특히 시아버지가 미나리나물을 드시고 싶다고 하셨을 때 추운 겨울이지만, 미나리 재배 주인을 설득하여 얼음을 깨고 채취하여 반찬을 해드리는 등 효행을 하셨어요.
□ 효부비는 누가 세웠습니까?
향교, 유도회, 성균관의 협조와 함께 우리 자손들이 세웠어요. 우리 가족들이 건립비를 모으고 세웠어요.
□ 효부비가 태월리 마을회관 옆에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효부가 거주했던 동네이고, 마을회관은 마을의 중심이기 때문에 그 옆에 세웠지요.
□ 후손이 본받아야 할 정신은 무엇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세상이 많이 변했을지라도,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효는 모든 행동의 근본이라고 생각해요.
□ 효부비는 어디에서 관리하고 있습니까?
기관이나 단체의 지원이나 관리는 없고, 우리 후손들이 보존 관리하고 있어요.
□ 효행에 관련해서 상을 받거나 기록이 있습니까?
상을 받은 적은 없고요, 한국효문화자료보감에 실려 있어요.
□ 후손이 조상의 효행을 기리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명절 때 손주들이 집에 오면 효부비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효행의 내용 을 말해 주고 있어요. 효행을 알게 하는 아주 작은 실천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손주들이 집에 오면 당연히 다녀오는 것으로 생각하더라고요. 교육은 그래서 필요한 것 같아요.
□ 효부비 보존 관리를 위해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입니까?
기회가 된다면 효부 비각을 설치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 조사자의 의견 : 효부비는 김중각이 글을 짓고 썼다. 그는 조사자 어머니의 외사촌 오빠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비인면 관리 통수뫼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하여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재직했다. 『모범한글서예』 등 글씨와 관련된 도서와 글씨본을 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보자도 김중각은 글씨를 잘 썼다는 말을 여러 번 증언했다.
사진
<사진 2. 효부비(뒷면)>
檀紀四三一九年(西紀一九八六年)
姨姪金重珏謹撰謹書 建立協贊 舒川郡鄕校典校 羅相部 外 二十名 儒道會支部長 白俊基 外 十二名
기록개요
생산자료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1980년대 후반에 결혼한 1961년생 여성의 구술을 정리하였다.
- 언제, 어떻게 결혼을 했나요?
28세에 반중매로 신랑을 만나 조금은 늦은 결혼을 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23~24세 이면 시집을 갔다. 친정아버지가 시집 안 간다고 화를 내시며 잔소리를 하셔서 결혼을 했다. 평소에는 “작은 공주” 하며 예뻐하셨는데, 시집갈 생각을 안 하니 화가 나고 속상하셨던 것 같다.
어느 날 시집을 안 갈 거면 일이라도 하라고 하시며 거래처 회사에 경리를 보라고 하셨다. 신랑이 운영하는 회사였다. 아버지는 취직을 계기로 신랑과 엮어 주려고 하셨던 거였다. 아버지는 믿음직하고 성실한 청년인 신랑이 무척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신랑이 이상형도 아니고 호감도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친해진 계기는 신문 십자말풀이를 하면서였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만났고 결혼하게 되었다. 그렇게 결혼생활은 시작되었고, 6년을 살다가 갑작스럽게 시어머니를 모시게 되어 신랑 고향인 이곳(장항?)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서울 토박이였지만 시골살이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터라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왔다.
- 시댁으로 들어가면서 어려웠던 점은 있었나요?
야행성이라 밤에 움직이고 아침에 늦게까지 자야 했는데, 시골의 삶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해서 적응할 때까지 힘들었다. 그것만 빼면 다른 것에 적응하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밭에 가서 “정구지”를 끊어 오라고 하셔서 알았다고 하고 밭에 갔는데, 정구지가 뭔지도 모르겠고 뭘 끊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옆집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부추를 베어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추의 방언인 정구지를 베어 오는 것을 끊어오라고 하니 알 수가 없었다.
- 시어머니 시집살이를 하셨나요?
시어머니가 신랑을 좋아하지 않았다. 첫째, 둘째 아들은 엄마의 말에 순응하는 효자였지만, 셋째인 신랑은 아니다. ‘어머님이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말하는 아들이다 보니 어려워하셨고, 덩달아 셋째 며느리 또한 어려워하셨던 것 같다. 그래도 시어머니는 “금은보화를 깔아줘도 셋째 아들과는 살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분이였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같이 사셨다.
남들이 생각하는 시집살이는 없었지만, 둘째 아주버님이 이혼하시면서 두 조카를 키웠다. 거기서 오는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상처도 받고 힘들었다. 갈등을 없애기 위해 일을 시작했고, 다행히 시어머니가 찬성하며 도와주셔서 더 이상 시집살이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8남매를 홀로 키워온 여성으로서의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거라고 같은 여자로서 공감했으며, 그로인해 감수성이 발동된 것 같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삶을 존중해 드리며 서로 공존해 나아갔다.
시집살이라는 게 말하기 쉽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완전히 다른 삶으로 되면서 내 삶을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맞춰야 하는 것이고 맞추지 못하면 시집살이가 되는 것이고 맞추어 살면 시집살이가 내 삶에 들어와 시집살이라고 느끼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여성으로서 삶이 아직은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다른 이의 삶을 들여다보며 공감하며 서로 존중할 수 있도록 자기 목소리를 드러내는 일에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진
기록개요
생산자료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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