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기록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가 서천을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마을기록 55

기록내용

시초면 후암1리 지명을 아는 주민 3인(1940~60년대생)을 대상으로 면담한 내용을 글로 정리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1차 때 마을 주민을 만나 자연마을과 지명을 개략적으로 파악하였다.

파악된 지명에 대해 관련 문헌과 인터넷을 검색하여 지명 유래를 정리했다. 2차 때 마을 주민을 만나 자연마을이나 해당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주민들 스스로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시간이 걸릴 때는 사전에 문헌이나 인터넷에서 수집한 내용을 조금 알려주고 가능한 주민들이 지명의 유래를 알아내도록 하였다. 최종적으로 주민들과 지명의 유래를 검토하고 토의하여 결정하는 단계를 거쳤다.


□ 후암1리 자연마을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후암1리는 뒷굴, 용두쟁이[용두정], 후동, 분덕골, 안텃굴, 원당굴이라는 자연마을이 있어요. 주민이 사는 마을은 뒷굴, 용두쟁이[용두정], 후동, 안텃굴이고 분덕골, 원당굴은 사람이 살지 않아요.

 

※ 조사자 의견

후암1리는 길산천을 경계로 하여 후암2리와 뚜렷하게 마을이 구분되고 있다. 길산천은 서천군 최대의 금강지류로 길이 23.0㎞이다. 문산면 금복 리 원진산(269.9m)에서 발원하여 남류하고 화양면 망월리에서 금강으로 유입한다. 시초면 후암리를 지나는 길산천의 길이는 2.3km이다. 문산면, 마산면, 시초면, 기산면, 서천읍, 화양면, 마서면의 7개 읍·면이 길산천 유 역이다. 후암1리는 문산면 지원리, 시초면 풍정리, 시초면 봉선리와 인접 하고 있다.

 

□ 마을이 [앞], [뒤]의 위치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뒷굴과 후동(後洞)이 있어요. ‘뒷굴’은 마을이 뒤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렇게 부르고 있어요. ‘후동’은 뒷굴을 한자로 부르는 마을 이름이라는 생 각이 들어요.


※ 조사자 의견

뒷굴과 후동은 똑같이 마을이 뒤[후]에 있다는 의미이다. 조선 후기 영조 시대 면(面), 리(里) 체제에 의하면 시방동면(時方洞面)에 후동리(後洞里)가 기록되어 있다. 후동(後洞)은 뒷굴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생겨난 마을 이름인 것 같다. 뒷굴과 후동(後洞)의 차이는 한자 後(뒤 후)에서 훈을 빌려서 ‘뒷굴’, 음을 빌려서 ‘후동’이라고 명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후동이라는 마을명은 뒷굴을 포함하여 후동리라고 부르다가 리(里) 명칭이 개편되면서 ‘후동리’는 없어졌지만, ‘후동’이라는 명칭만이 남게 된 것 같다.

 

□ 용[왕]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용두쟁이가 있어요. ‘용두쟁이’는 마을의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고, 용두정(龍頭亭)이라고도 해요. 용두쟁이는 뒷굴 동쪽에 자리 잡고 있어요.

 

※ 조사자 의견

‘용두쟁이’는 처음에 ‘용두정이’라고 부르다가 발음 편의상 ‘용두쟁이’로 어형이 변형된 것으로 생각된다. 용두정(龍頭亭)이라는 이름은 ‘지형이 용의 머리같이 생겼다’라고 하여 부르고 있다. ‘용두정’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접미사 ‘정(亭)자로 보아 옛날 이곳에 정자(亭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묘지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분덕골재가 있어요. ‘분덕골재’는 공동묘지가 있어 ‘분덕골’이고 이곳을 지나서 풍정리로 넘어가는 고개이기 때문에 ‘분덕골재’라고 부른 것 같아요. 분덕골 입구에 들어서면 예전에 어떤 가난한 사람이 벽돌 대신 뗏장으로 벽을 쌓아 지은 뗏장집이라고 부르던 주막집이 있었어요.

 

※ 조사자 의견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서 ‘분덕골’이라는 지명이 나타나고 있다. 이 지명은 주변에 공동묘지가 분포하고 있어 ‘분덕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는 분청 사기 등을 굽는 분토가 나와서 ‘분토골’일 수도 있다. 그런데 시초면 후암리 분덕골은 주변에 공동묘지가 있고, 예전에도 이곳에 고려장이 많이 나왔다고 함으로 공동묘지와 관련이 깊은 지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덕골재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형이 변화되어 부르기 쉽게 부덕골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천군의 행정지도에는 부덕골재라고 기록하고 있다.

 

□ 마을이 안팎의 위치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안텃굴이 있어요. ‘안텃굴’은 마을이 골짜기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 조사자 의견

안텃굴에서 ‘안터’라는 말은 어떤 장소의 내부인 안[內]쪽을 의미한다. 안텃굴은 마을이 골짜기 안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안텃굴은 조선시대 이괄의 난 당시 천안 군수를 지내던 사람이 이곳으로 난을 피해 와서 살게 된 것이 현재 이 마을에 사는 고성이씨의 16대 선조라 하며, 그로 인해 고성이씨가 많이 살아왔던 마을이다.

 

□ 무속 신앙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원당굴이 있어요. ‘원당굴’은 주변 지역에 잘 알려진 여자 무당인 ‘당골’이 살고 있는 골짜기라서 그렇게 부른 것 같아요. 실제로 원당굴에는 여성 무속인인 무당이 1990년대 말까지 살았어요.

 

※ 조사자 의견

토속신을 제사 지내는 사당(詞堂), 당산(堂山)이나 또는 무당(巫堂)이 있던 곳에는 ‘당골[堂谷]’이라는 지명이 붙여진 곳이 많다. 특히 여자 무당을 ‘당골’이라고 한다. 당(堂)에 대한 지명은 당곡(堂谷), 원당(元堂), 사당(舍堂) 등의 형태로 전국 곳곳에 남아 있다. 원당굴은 원당이 있었던 골짜기 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을 주민에 의하면 ‘후암1리에 속하는 원당굴에는 여러 채의 집이 있었고 그중에 신내림을 받아 신을 섬기며 굿을 하는 여성 무속인이라 불리는 무당이 활동하는 법당이 차려진 집이 존재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 숨어 있다는 뜻인 은(隱)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엉고개가 있어요. ‘엉고개’는 마을에서 혼자 지나가려면 음침하여 무서웠던 고개였어요. 고개가 제법 길고 인적이 뜸한 산속을 지나 넘어가는 고개여서 그렇게 부른 것 같아요.

 

※ 조사자 의견

엉고개 너머에 사는 주민들에 의하면 옛날에 고개가 길기도 하고 음침하여 혼자 걷기에는 무서운 길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또한 고개 넘을 때 돌은 던지던 서낭당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지명 ‘엉고개’는 ‘엉’과 ‘고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엉’은 경상도와 전라남도에서 낭떠러지를 말하는 방언이다. 또 다른 뜻은 ‘엉’은 ‘어은’의 변화형으로 어은고개->언고개->엉고개’로 될 수 있다. ‘어은고개’은 대부분 ‘은고개’과 함께 쓰임을 볼 때, ‘엉고개’ 또한 ‘은고개’와 대응시킬 수 있다. ‘은고개’는 ‘은(隱)’과 관련하여 숨은 고개로 해석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엉고개는 숨은 고개의 의미와 더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참고 문헌 ]

서천군, 서천군지, 1988

서천군지편찬위원회, 서천군지, 2009

서천문화원, 시초면지, 2019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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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시초면 후암리(1910~1930년대)

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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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시초면 후암리 마을

출처 : 서천군행정지도(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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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시초면 후암리 행정구역

※ 출처 : 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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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시초면 후암1리 지명(위성지도)

※ 네이버 지도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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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시초면 후암2리 지명(지형지도)

※ 네이버 지도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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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원당굴(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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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안텃굴(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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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분덕굴재(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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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엉고개(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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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후동(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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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 용두쟁이(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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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 뒷굴(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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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 길산천(2023년 11월)


기록개요

기록명시초면 후암1리 지명기록방법글, 그림, 사진
마을명시초면 후암1리시대1940년 ~ 현재
개요시초면 후암1리 지명과 유래검색어#후암리, #뒷굴, #용두쟁이, #후동, #분덕굴, #안텃굴, #원당굴, #엉고개
수집 및
생산자료
수집 자료 : 그림 3점
생산 자료 : 그림 2점, 사진 8장
제보자백ㅇㅇ(남, 1941년생), 이ㅇㅇ(남성, 1950년생), 백ㅇㅇ(남성, 1959년생)
기록자방갑주기록기간2023. 11. 02. ~ 11. 13.
관련사업서천읍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관련기관서천군 농업기술센터, 서천 중심지 지원센터,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마을기록 원본 -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혹은 '서천군청 자치행정과 교육지원팀' 문의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비인면 선도리 지명을 아는 주민 3인(1930~60년대생)을 대상으로 면담 내용을 글로 정리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 선도리 자연마을을 아는 대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선도리는 솔머리, 용수말, 왕마지[양마지]라는 자연마을이 있어요.

 

※ 조사자 의견

선도리는 서해 연안에 접하고 있으므로 마을이 대부분 평지에 분포하고 있다. 선도1리에 솔머리, 선도2리에 용수말, 선도3리에 왕마지 자연마을이 있다. 왕마지는 동네에서 양마지라고 부른다. 솔머리에는 묘금도(卯金刀) 유씨(劉氏)와 밀양(密陽) 박씨(朴氏)의 집성촌이 있다.

 

□ 나무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솔머리와 솔안이 있어요. ‘솔머리’는 옛날부터 소나무가 무성하여 마을이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솔머리, 송두(松頭)라고 하지요. ‘솔안’은 솔머리에서 북동 방향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 조사자 의견

해안에 인접하여 자라는 소나무인 해송은 바람에 의해 형성되는 사구(砂丘)의 모래를 고정시켜 주고, 바다에 인접한 동네에 겨울철 차가운 북서 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해안에 소나무가 무성하여 그것이 마을을 대 표하는 상징물이 된 것이다. 우리 눈에 잘 띄는 외형적인 자연물이 마을 의 지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솔머리는 바다에서 배가 들어오는 곳이므로 배들이, 선입(船入), 선임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는 솔머리는 배들이 지역으로 선동(船東)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선서(船西)로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최근에 ‘솔머리’라는 지 명이 자연마을을 대표하고, 그 밖에 송두(松頭), 배들이, 선서라고도 부른다. 솔머리는 해안선과 거의 평행하게 북서-남서 방향으로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북서 방향에 있는 마을을 큰뜸, 남서 방향에 있는 마을을 작은뜸이라고 불렀다. ‘뜸’은 한동네 안에서 여러 채의 집이 따로 모여사는 구역을 의미한다. 큰뜸과 작은뜸은 모여있는 것은 같지만, 많이 모여 있으면 ‘큰뜸’이고 적게 모여있으면 ‘작은뜸’이 된 것이다. 마을 명칭이 규모를 기준으로 나누어졌다. 또한 솔머리의 작은뜸 동쪽에 솟대가 있었던 곳을 솟대배기라고 불렀다. 또한 솔머리와 솔안은 서로 관련이 있는 명칭이다. 따라서 솔머리에 속하는 마을은 ‘큰뜸’, 작은뜸‘, ’솟대배기‘가 있고, 별도로 솔안이 있다.

 

□ 용[왕]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용수말, 왕마지[용지]가 있어요. ‘용수말’은 지형의 형상이 용의 머리 부분 같은 마을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러요. 용수말은 ‘배들이’라는 마을에서 볼 때 동쪽에 위치하므로 선동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또한 용과 관련되는 마을은 용지 또는 왕마지[양마지]가 있어요. 이곳은 용이 하늘로 승천한 용못 옆에 있으므로 그렇게 부르는 마을 이름이지요.

 

※ 조사자 의견

선도2리에서는 대표지명으로 선동보다는 용수말이라는 마을명을 많이 사용한다. 배와 관련된 지명보다는 용과 관련된 지명을 선호하고 있다.

선도3리에서는 마을명을 용지보다 왕마지[양마지]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용지 또는 용못에서 앞에 용의 글자는 용(龍)으로 같은 한자지만 뒤에 ‘지’와 ‘못’이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사용하는 차이이다. 즉, 한자 池(못 지)에서 음은 ‘지’이고 훈은 ‘못’이 된다. 따라서 음을 빌리면 ‘용지’이고 훈을 빌리면 ‘용못’이 된다. 둘 다 용이 하늘로 승천한 ‘지’와 ‘못’이 되어 용지 또는 용못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용지[용못]에서 용(龍)은 왕(王)을 상징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마을명인 왕마지는 한자로 王馬池(왕마지)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도 용지[용못]과 왕마지에서 ‘용’자와 ‘왕’자가 대응하고 ‘지(못)’자와(가) ‘지’자와 대응하고 있어 글자만 다르고 의미는 같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선도2리 마을은 용수말 또는 선동이라 부르고, 선도3리는 왕마지 [양마지] 또는 용지라고 부르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 솟대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솟대배기가 있어요. ‘솟대배기’는 옛날에 솟대가 있던 자리라 하여 그렇게 불렀어요. 옛날부터 동네 어른들께 들어서 알고 있어요.

 

※ 조사자 의견

솟대배기는 옛날에 수호신으로 모셨던 솟대가 박혀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마을 풍어제(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배가 있는 집만 각자 지내고 있다. 솟대 부근에 솟대배기샘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마을의 상징이 되거나 마을의 중심이 될 만한 것이 마을에 있으면, 그것이 마을 이름의 소재가 되었다. 솟대는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혀 마을 수호신으로 믿는 상징물이다. 솟대배기는 배들 이 동쪽에 있는 터이다. 솟대배기터는 솔머리에서 용수말 입구까지라고 알려져 있다.

 

□ 군사와 방어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망생이가 있어요. ‘망생이’는 선도리 앞바다로 침입하던 적을 방어하기 위해 망을 보던 곳이어서 망생이라고 불러요. 예전에 동네 어른들은 망생이를 망선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나요.

 

※ 조사자 의견

망생이 마을은 인근의 송산(宋山)에서 키운 소나무를 베어 덤장을 만드는 목재를 대어 주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망생이는 망을 보던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살아왔던 지역이기도 하다.

망생이는 풍수지리적으로 ‘배 형국’이라 집에 재물이 모이면 배가 무거워져 가라앉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부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마을을 떠났다 고 한다.

 

□ 고개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오얏재가 있어요. ‘오얏재’는 선도리에서 성내리로 넘어가는 고개지요. 옛 날에 아주 좁은 외길이었어요. 아마도 그래서 오얏재라고 부른 것 같아요. 동네에서 땅을 사서 좁은 길은 넓혔어요.


※ 조사자 의견

예로부터 비인면 선도리와 성내리를 왕래가 빈번했던 중심이 되는 고개 였다. ‘오얏’은 우리말에서 오랜 옛날에 '어버이, 크다'라는 의미로 쓰였었 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 고개는 선도리에서 성내리를 왕래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길이었으므로 ‘오얏재’라고 불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장래 풍습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영정 모탱이(모퉁이)가 있어요. ‘영정 모탱이’는 고인의 사진을 검정색 액자에 끼우고 검정색 리본을 두른 것을 영정(影幀)이라고 하는데, 돌아가신 분을 상여로 운구할 때 앞에서 영정을 모시고 가지요. 영정을 들고 산모탱이를 돌아가는 데서 ‘영정 모탱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 조사자 의견

상여 나갈 때 고인이 생전에 다니던 길이나 많이 즐겨 찾았던 장소를 거쳐 운구하게 된다. 선도리 마을에서도 상여가 출발하면 운구가 시계 방향으로 상여가 이동하는데 고인의 영정을 들고 다리도 건너고, 모퉁이도 지나는데 특히 영정이 건너는 다리를 ‘영정 다리’라고 부르고, 영정이 지나가는 산모퉁이를 ‘영정 모탱이’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 둠벙[샘]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참삿골이 있어요. ‘참삿골’은 찬물이 나는 둠벙이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에요. 둠벙의 크기는 긴 변이 6m, 작은 변이 4m 정도 되었어요. 둠벙의 물이 차서 여름철에 그물로 친구들과 같이 상체를 굽혀 엎드린 채로 친구의 도움을 받아 허리에서부터 목까지를 물로 씻었던 등목이 생각나요. 물이 너무 차고 시원해서 자주 사용했던 기억이 있어요.

 

※ 조사자 의견

‘참삿골’에 있는 둠벙[샘]은 가장 위쪽에 있는 다랑논에 있었다. 참삿골은 차가운 둠벙[샘]이 있어서 처음에 찬샘골로 불리다가 부르기 쉽게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매립되어 볼 수 없다. 아마도 물이 너무 차가워 농업용수 등 사용이 어렵기도 하고, 지하수가 보급되면서 매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 도난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도적골이 있어요. ‘도적골’은 옛날 가난한 시절에 마을에서 물건을 많이 도둑맞아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사람들이 이 마을을 지나 종천을 거쳐 판교우시장을 다녔다고 동네 어른들께 들은 적이 있어요.

 

※ 조사자 의견

도적골은 사람들이 시장을 다니는 길목이기 때문에 도둑을 많이 맞은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동네의 인심이 흉흉해져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쇠퇴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섬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쌍도가 있어요. ‘쌍도’는 비인 갯벌에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래서 쌍도라고 불러요. 전설도 전해져요. 최근에는 쌍도 주변의 갯벌에서 맛조개를 잡는 등 갯벌 체험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쌍도는 현재 사유지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개발에 어려움이 있기도 해요.

 

※ 조사자 의견

1) 쌍도에 대한 고문헌 기록 내용

조선시대에 작성된 고지도에는 쌍도가 나와 있다. ‘호서지도’와 ‘해동지도’의 비인현 지역에는 섬이 나란히 있다는 의미로 ‘竝島(병도)’라고 표 시되어 있다. 특히 ‘호서지도’의 여백에는 쌍도에 대한 설명이 추가되어 있는데 ‘竝島周回四里居住民無居官門七里’라고 적혀 있다. 이는 병도(쌍 도)의 둘레는 4리(1.6km)이며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 없고, 관아까지의 거리는 7리(2.8km)이다‘라는 의미이다.

 

2) 쌍도에 대한 전설

 

전설 1

쌍도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무인도이며, 옛날 쌍둥이를 둔 홀아비가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죽자 아들 쌍둥이가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다 죽어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설 2

’이무기와 김총각‘이라는 전설이 있다. 선도리는 옛날에 홍수가 나면 금강 상류로부터 떠내려 오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큰 집, 죽은 돼지, 통나무 등이 떠내려왔으며 이런 것들은 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가 되었다. 그래서 홍수가 나면 바닷가에 사람들이 모여 무엇이 떠밀 려 오는지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어느 해인가 홍수가 났는데 물 중간에 큰 통나무가 떠밀려 오고 있었다 고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큰 나무는 갖게 되면 소득이 되기 때문에 서로 가지려고 하였다. 이웃 동네에 사는 ’김 총각‘이라는 사람이 큰 통나무 를 먼저 갖기 위해 물을 헤엄쳐서 갔다고 한다. 그런데 헤엄쳐서 건너가 보니까 통나무가 아니라 수염이 난 용과 큰 구렁이 사이의 이무기였다. 그래서 김 총각이 홱 돌아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무기가 김 총각 뒤를 쫓았다. 물속에서는 이무기를 사람이 속도로 이길 수 없지만 꼭 잡아먹히게 생겼는데도 이무기가 사람을 못 잡았다고 바닷가에서 사람이 여러 명이 보았는데, 김 총각이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날고 있었다. 그래 서 이무기는 김 총각을 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알고 보니까 김 총각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있었는데, 위급한 상황이 되어 김 총각이 날았던 것이다. 그런데 옛날에 기인이나 이상한 장수가 나 오면 역적질을 한다고 생각하여 없앴다고 한다. 김 총각의 집안에서도 문중회의를 하여 집안의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해 김 총각이 자고 있는데 팔 다리를 꽁꽁 묶고 날개를 잘라 버렸다. 그래서 날개를 자르자 피가 천장까지 솟구쳤지만 그래도 날개가 붙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날개를 붙지 못하게 하려고 재를 뿌려 결국 그 총각은 죽었다고 한다.

김 총각을 쫓았던 이무기는 쌍도에서 나왔다. 쌍도의 꼭대기 밑에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가 있는데 거기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용이 되기 직전에 홍수가 나서 바람결에 밖에 나왔다가 이런 일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그 후 십년 공을 들여 하늘에 올라가려고 하는 순간에 임산부가 그 장면 을 목격하였고 부정 타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 참고 문헌 ]

서천군, 서천군지, 1988

서천군지편찬위원회, 서천군지, 2009

서천문화원, 비인면지, 2016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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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비인면 선도리 행정구역

※ 출처 : 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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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비인면 선도리 지명(위성지도)

※ 네이버 지도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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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비인면 선도리 지명(지형지도)

※ 네이버 지도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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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솔머리(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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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큰뜸(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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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작은뜸(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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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솟대배기(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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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솔안(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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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 용수말(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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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7> 오얏재(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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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8> 왕마지(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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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9> 참삿골(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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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0> 도적골(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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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1> 망생이(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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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2> 영정 모탱이(2023년 11월)


기록개요

기록명비인면 선도리 지명기록방법글, 그림, 사진
마을명비인면 선도리시대1903 ~ 현재
개요비인면 선도리 지명과 유래검색어#선도리, #솔머리, #큰뜸, #작은뜸, #솟대배기, #솔안, #용수말, #오얏재, #왕마지, #참삿골, #도적골, #영정모탱이
수집 및
생산자료
수집 자료 : 그림 1장
생산 자료 : 그림 2장, 사진 12장
제보자박종성(남성, 1941년생), 임중호(남성, 1944년생), 김중태(남성, 1960년생)
기록자방갑주기록기간2023. 08. 31. ~ 11. 06.
관련사업서천읍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관련기관서천군 농업기술센터, 서천 중심지 지원센터,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마을기록 원본 -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혹은 '서천군청 자치행정과 교육지원팀' 문의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문산면 구동1리 지명을 아는 주민 4인(1930~60년대생)을 대상으로 면담한 내용을 글로 정리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 구동1리 자연마을을 아는 대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구동1리[구변굴]는 아랫뜸, 중뜸, 윗뜸, 소라티라는 자연마을이 있어요.

 

※ 조사자 의견

구동1리는 대략 북서~남동으로 길게 놓인 골짜기에 가옥이 분포하고 있다. 햇볕이 잘 들고 주변의 산이 병풍 같이 바람을 막아주는 아늑한 마을이 다. 이곳은 귀농(촌)인들이 선호하는 지역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하다.

 

□ 고개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오얏고개[요오고개]가 있어요. 오얏고개[요오고개]는 구동리 소라티에서 금복리로 넘어가는 고개지요. 할머니가 생전에 계실 때 가끔 오얏고개[요오고개]를 넘어갈 때 여우를 만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이 있어요. 오얏고개는 요오고개라고도 하는데 ‘요오’는 ‘여우’를 그렇게 부른 것 같아요. {양갑준(남성, 1965년생)}

 

※ 조사자 의견

현재 버스가 이 고개를 넘어 운행되고 있다. 예로부터 문산면 구동리, 은 곡리, 지원리와 먼 곳의 부여군 충화면, 임천면 등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판교장을 왕래하던 고개였다. ‘오얏’은 우리말에서 오랜 옛날에 '어버이, 크 다'라는 의미로 쓰였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 고개는 판교 우시장을 왕래하는 데 매우 중요한 옛길이었기 때문에 ‘오얏고개’라고 불리었을 것 이라는 생각도 든다.


□ 위치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아랫뜸, 중뜸, 윗뜸이 있어요. ‘아랫뜸’은 구동1리에 들어오면 첫 번째 마을이지요. ‘중뜸’은 수령 380년 된 정자나무[느티나무]가 있는 마을이에요. 구변굴 골짜기의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 중뜸이라고 불러요. ‘윗뜸’은 구동1리 마을회관이 있는 마을이에요. 아랫뜸과 중뜸보다 위쪽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 조사자 의견

마을이 위치하는 곳이 위, 중간, 아래인지를 기준으로 나누고 있다. 마을 로 들어오는 입구를 아래쪽으로 보고 아랫뜸, 올라가면서 중간은 중뜸, 위쪽은 윗뜸으로 부르고 있다.

‘뜸’은 한동네 안에서 여러 집씩 따로 한데 모여 사는 구역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연부락 명칭은 마을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어서 마 을을 지칭할 때 명료하게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 전설과 관련된 지명이나 산이 있나요?

쌍봉산이 있어요. 가늠골 안쪽으로 들어가야 쌍봉산을 볼 수 있어요. ‘쌍봉산’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지요. ‘금복리에 있는 쌍봉산에 옛날 부자(父子)가 나무하러 갔는데 아들이 먼저 올라가고 아버지가 뒤 따라 올라갔다. 그런데 위에서 큰 돌이 굴러 내려오니 아들이 “아버지 돌 굴러가유~”라고 말했으나 그 말이 느려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는 그 돌에 맞아 숨졌다’라는 이야기로 충청도의 느린 언어 특징을 일컬을 때 자주 비유되고 있는 내용이지요.

 

※ 조사자 의견

쌍봉산은 구동리보다 금복리에 더 가까이 있는 산이다. 산은 금복리에 있 지만, 아마도 부자(父子)는 구동리에 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구 동리에 관련된 전설로 내려오는 것 같다. 배경보다 마을 사람 중심으로 내려오는 전설이다. 쌍봉산은 등고선을 그려보면 산봉우리가 두 개로 되 어있어 그리 부르는 것으로 생각된다.

 

□ 골짜기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고라실, 가늠골이 있어요. ‘고라실’은 골짜기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불러요. 민가가 한 채 있지만, 지금은 빈집이에요. 아랫뜸에서 산쪽으로 들어가면 고라실이 있어요. ‘가늠골’은 윗뜸에서 건너편 남쪽을 바라볼 때 폭이 좁고 긴 산골짜기를 말해요.

 

※ 조사자 의견

모양에서 폭이 좁은 상태를 강조할 때 ‘가늘다’라고 표현한다. ‘가늠골’은 골짜기의 폭이 좁아 생겨난 지명이다. 현재 좁은 골짜기에 계단식 논이 분포하고 있다.


□ 샘이나 우물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참샛골[참삿골, 삼삿골]이 있어요. ‘참샛골[참삿골, 삼삿골]’은 찬 샘이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에요. 예전부터 지금까지 샘물은 한 번도 마른 적이 없었고, 지금도 식수로 사용하고 있어요.

 

※ 조사자 의견

‘참샛골’의 본래 지명은 ‘찬샘골’이었을 것이다. 샘이 솟아나는데 수온이 낮기에 생겨난 지명이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찬샘골’이 ‘참샛골’ 등으로 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참샛골’은 찬 샘이 있는 골짜기라는 의미이다.

 

□ 어떤 모양과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소라티, 다섯모롱이, 턱골이 있어요. ‘소라티’는 지형이 소라를 닮았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이죠. 구변굴에서 북서쪽에 위치하고, 민가 10여 호가 있어요. 이곳에는 조선조에 정6품 이조좌랑과 정4품 사헌부 장령을 지낸 평산 신씨 신사온(申士溫)의 묘와 신도비가 있어요. 소라티는 평산 신씨의 집성촌이었어요.

 

‘다섯모롱이’는 산모롱이가 다섯으로 되어있다고 하여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이곳은 아랫뜸과 중뜸 사이에 있으며 아랫뜸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지요. 지금은 산자락에 도로가 나 있지만 과거에는 도로에서 약간 산 위쪽으로 소로가 있어서 그 길을 통해 아랫뜸과 중뜸을 왕래할 수 있었어요.

 

‘턱골’에 샘이 있는데 그 샘과 옆에 있는 길은 높이가 달라요. 샘에서 길을 쳐다보면 샘보다 길이 높게 위치하여 턱같이 느껴져요. 그래서 ‘턱골’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턱골’에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고, 이물은 땀띠와 부스럼에 효험이 있어 약물로 알려져 있기도 해요.

 

※ 조사자 의견

‘소라티’에서 ‘티’는 고개를 뜻하는 순수 우리말인데, ‘재’도 있다. ‘티’를 한 자로 적을 수 없어 ‘치(峙)’라는 한자를 빌려 표기하기도 한다. ‘소라티’는 고개이므로 이곳에서 구동 2리, 금복리 등으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이 다. ‘다섯모롱이’는 산모퉁이의 휘어 둘린 곳이 다섯 개가 있다는 의미이 다. 지금도 옛길이 조금 남아 있다.

‘턱골’은 한 장소의 높낮이가 다른 것에 모양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 로 ‘문턱’에서 ‘턱’은 방과 문 사이의 솟아오른 부분을 일컫는 것처럼 말 이다.

 

□ 신(新), 구(舊)와 관련된 지명이 있나요?

‘낡은터’가 있어요. ‘낡은터’는 중뜸에 있는 곳인데, 아마도 마을에서 오래된 장소를 의미하는 것 같아요. 현재 두 집이 살고 있고 최씨 문중 종중 땅이 있어요.

 

※ 조사자 의견

‘낡은터’라는 지명은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체로 이 지명은 마을이 최초로 형성되었던 곳인 ‘원마을’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러면 이에 호응하는 ‘새터’가 있어야 하는데 원마을에서 벗어난 곳에 있는 마을이 ‘새터’일 것이다. ‘낡은터’라는 곳이 이 마을의 시초가 될 여 지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참고 문헌 ]

서천군지, 1988, 서천군

서천군지, 2009, 서천군지편찬위원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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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문산면 구동리(1910~1930년대)

※ 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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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문산면 구동리 마을

※ 출처 : 서천군행정지도(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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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문산면 구동리 행정구역

※ 출처 : 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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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문산면 구동1리 지명(위성지도)

※ 네이버 지도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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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5> 문산면 구동1리 지명(지형지도)

※ 네이버 지도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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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아랫뜸(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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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중뜸(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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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윗뜸(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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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소라티(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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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참샛골(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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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 턱골(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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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7> 가늠골(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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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8> 오얏고개(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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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9> 쌍봉산(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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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0> 다섯모롱이(2023년 9월)


기록개요

기록명문산면 구동1리 지명기록방법글, 그림, 사진
마을명문산면 구동1리시대1930 ~ 현재
개요문산면 구동1리 지명과 유래검색어#지명, #구동리, #자연부락, #고개, #위치, #전설, #골짜기, #샘(우물), #지형, #쌍봉산, #길
수집 및
생산자료
수집 자료 : 그림 3점
생산 자료 : 그림 2점, 사진 10장
제보자양희선(남성, 1936년생), 강성옥(여, 1964년생), 양갑준(남성, 1965년생), 김종섭(남성, 1967년생)
기록자방갑주기록기간2023. 08. 26. ~ 09. 08.
관련사업서천읍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관련기관서천군 농업기술센터, 서천 중심지 지원센터,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마을기록 원본 -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혹은 '서천군청 자치행정과 교육지원팀' 문의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제보자 강기순 님은 서천군 문산면 금복리 원당마을에서 농촌지도소를 다니시던 아버님 강선묵 씨와 어머님 사이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서천에서 학업을 마치고 외지에 나가 생활하다가 아버님 소천 후 귀향하여 현재 어머님을 모시고, 소를 10여 마리 키우며 살고 있다. 또한 어엿한 가수로서 봉사활동과 지역축제 등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는 어릴 적 꿈을 이룬 삶을 살고 있다.


“너무나 하고 싶었어요. 노래가~”

 

1. 어릴 적 꿈이 가수였나요?

 

어릴 적 꿈이 가수였어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해서 어디서든 자리만 되면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좋아해주고 박수쳐주는 모습이 너무 좋고 자신감도 생겨서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어요. 학생시절 소풍이나 가끔 서천읍에서 열리는 작은 노래 대회가 극장 같은 데서 열리면 빠지지 않고 참가하면서 저의 꿈은 더욱 단단해진 것 같아요.

 

2. 꿈을 향한 본격적인 노력은 어떻게 하셨나요?

 

늘 가수의 꿈을 그리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는 놓치지 않고, 연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쯤 오아시스레코드사가 주최한 <전국 남녀 가수선발대회>(1974년) 벽보를 보고 그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어요. 가수 배호님의 노래를 불러 특별상을 받았고 대회 주최사(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10만원을 내고 앨범을 내자는 제안까지 받게 되어 뛸 듯이 기뻤어요.

 

3. 좌절, 포기

 

가수선발대회에서 받은 트로피와 상장을 들고 집에 돌아와 자랑스럽게 아버지께 가수의 꿈을 말씀드리자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반대는 너무 완강하셨어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이었죠. 하루 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느낌이었어요. 7남매의 장남인 저를 반드시 공무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 놈의 딴따라로는 제대로 된 직업이 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당시에 저는 딴따라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가 없어서 일단 꿈은 접어야했고 너무나 음악을 하고 싶어서 아버지가 안 계실 때 몰래 벽장에 숨겨놓은 기타를 꺼내 치며 노래를 불렀어요. 가끔은 현대그룹 정주영명예회장님처럼 서울로 도망가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결국 아버지 뜻을 거역할 용기가 나지 않아 포기했어요. 그리고 공무원은 너무 하기 싫어서 축산을 하다가 외지에 나가서 살았어요. 당시 어머니는 반대는 안하셨지만 아버지의 뜻이 너무 완강하시니 아무 말씀도 못 하시고 눈치만 보는 상황이었죠. 그 당시 아들이 몰래 노래하고 기타 치는 모습을 보면 딱해서 마음이 안 좋았다고 하셔요. 밤에 자려고 하면 노래를 너무 부르고 싶은데 소리가 밖에 들릴까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노래 부른 적도 많아요.

 

4. 꿈이 다시 떠오름

 

6년 전에 몸이 안 좋아져 수술을 하고 몇 년 동안 일도 쉬게 되자 사는 재미도 없고 많이 우울해지고 삶의 의욕을 잃었어요. 한동안 그렇게 지내다 문득 내가 가장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노래를 불러볼까 하다가 또 이제 나이도 많이 먹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포기를 했어요. 그러다 2016년 5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계셔서 10월쯤에 금복리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소를 10여 마리 키우면서 건강을 위해 저녁마다 걸으면서도 이어폰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달랬어요. 그리고 코로나 시즌에 TV조선에서 미스터트롯 프로그램이 방영되면서 어머니와 함께 그 방송을 시청하면서 더욱 노래가 하고 싶어지기도 했어요. 그 프로그램에서 새롭게 조명된 노래들을 자꾸 따라서 불러보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리고 얼마 후 문산면 마을화합잔치에 나가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상도 받고 너무 행복했어요.

 

5. 가수 강기순 – 반쪽짜리 꿈

 

시골 생활이 너무 지루하게 느껴지고 있다가 가끔 노래를 부를 기회가 생기다보니 직업으로는 아니고 취미로라도 무대에서 노래를 가끔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그래서 노래하는 사람들도 찾아 만나고 2022년에는 ‘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서울지회’에 나가 함께 활동을 하게 되면서 지회장도 맡게 되고, <락당예술단>에서 ‘가수분과위원장’도 했었고, 단장(최 길)으로부터 앨범 취입 제안도 받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소소하게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봉사활동도 하고 마을화합행사나 각종 군내축제에도 초청받아서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요. 올 가을에만도 꽤 많은 무대에서 가수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니 얼마니 즐거운지 몰라요.

혹시 어릴 때부터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도 해 보지만 지금 이렇게 늦게 이룬 반쪽짜리꿈도 나쁘지 않아요. 저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꿈을 강요하지 말고 그들의 꿈을 이루도록 응원 해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고 있어요.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가도록 응원해 줄 겁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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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가수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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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오아시스레코드사 주최 1974년 전국 남녀 가수선발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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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락당예술단 창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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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락당예술단 창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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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대전 교통방송 가족노래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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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 문산면민체육대회무대 후 국악인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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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7> 장항읍 꼴갑축제에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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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8> 판교면민체육대회 및 화합잔치


기록개요

기록명반쪽짜리 꿈을 이룬 가수기록방법글, 녹음, 사진
마을명문산면 금복2리시대1956년 ~ 현재
개요부모의 반대로 포기했던 가수의 꿈을 반쪽 이룬 가수 이야기검색어#가수강기순, #노래, #꿈, #가수,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금복리, #오아시스레코드, #봉사활동
수집 및
생산자료
수집 자료 : 사진 6장
생산 자료 : 사진 2장
제보자강기순(남성, 1956년생, 문산면 금복리 출생)
기록자오정례기록기간2023. 09. 09. ~ 10. 10.
관련사업서천읍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관련기관서천군 농업기술센터, 서천 중심지 지원센터,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마을기록 원본 -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혹은 '서천군청 자치행정과 교육지원팀' 문의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여단(厲壇)은 제사를 받아먹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을 위해 나라가 군과 현에 지시해 조성한 제단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박수환 향토사학자는 “여단제는 조선 태종 1년 권근의 주청으로 명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처음으로 서울 北郊(북교)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낸 것이 시초”라면서 “이후 각 군·현(郡縣)에 명령해 여단을 쌓고 제를 지내도록 했다”고 했다. 이에 따라 서천읍(오석산), 한산면(건지산), 비인면(비인중 뒷산) 등 3군에도 각각 여단이 조성되고 정기적으로 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 성황신과 여단제

 

좌측에는 인재 관련 죽음 6종, 우측에는 천재 관련 죽음 10종

 

잡귀신을 불러 모으는 역할은 성황신이 맡는다.

박수환 향토사학자는 “ ‘너희들에게 제사 지내주겠다. 그러니 사람들 해코지하지 말고 나를 따라오라’라는 성황신의 말을 듣고 따라온 온갖 잡귀들의 제단이 여단”이라면서 “여제는 봄에는 청명, 가을에는 7월 15일, 겨울에는 10월 초하루 3회를 행하며, 전염병, 괴변, 전쟁이 벌어지면 그때마다 날을 받아 군수나 현감이 제주가 되어 제사를 지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여단제 순서는 3일 전에 성황사에서 여제의 시작을 알리는 발고제(發告祭)의식을 행한 뒤 성황신을 모시고 여단에 모여 성황신을 중심으로 좌, 우 15종의 여귀를 나열한다.

 

좌측에는 인재(人災)와 관련된 죽음 6종(1. 전쟁에서 병사한 귀신 2. 수재, 화재와 도적에게 죽은 귀신 3. 도둑 만나 죽은 귀신 4. 천재지변으로 죽은 귀신 5. 전염병으로 죽은 귀신) 우측에는 천재(天災)와 관련된 죽은 귀신(1. 맹수나 독사에게 물려 죽은 귀신 2. 추위에 얼어 죽은 귀신 3. 굶주려 죽은 귀신 4. 전투로 죽은 귀신 5. 담이나 집에 깔려 죽은 귀신 6. 난산으로 죽은 귀신 7. 벼락 맞아 죽은 귀신 8.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귀신 9. 후손 없이 죽은 귀신 10. 목을 매고 죽은 귀신)에게 지방으로 쓴 위패를 세워뒀다.

 

여단제는 성황당에서 성황신을 모셔오면서 농악을 울리면서 동네 구석구석을 돌면서 토끼몰이처럼 귀신을 몰고 여단에 이르면 제관들이 여단에 상을 차린다. 제사가 끝나면 누군가 “무자위(無子位)” 하고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모두 따라 “무자위(無子位)” 하면서 절을 하고 여제 단의 문을 잠그면 귀신들은 갇히게 되어 전염병이 더 이상 창궐하지 못하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여단제는 보통 군수나 현감이 지냈으며, 나라의 큰 변고가 있을 때는 왕이 직접 축문을 지어내라는 등 국가 차원에서 여제를 지낸다. 대표적인 기록을 보면 조선 중종 20년(1525년)에 평안도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지면서 770명이 죽었다. 이에 중종은 의원을 파견하고 종묘, 사직단, 여단제를 지냈다.

 

현종 12년(1671)에는 전국적으로 기근이 심해 돌림병이 크게 나돌자 국가 차원에서 여단을 새로 쌓고 죽은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주었다.

숙종은 1544년 11월 전염병이 더욱 기승을 부리자 성황발고제와 함께 여제의 축문을 써서 중신을 보내 북교에서 여단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국조보감에 나온다.

 

“재앙이 절박하여 천천히 말할 여유도 없다. 이에 측근 신하를 보내고 직접 제문을 지어 나의 속마음을 토로하니…. 신이시어 밝게 살펴 내가 올리는 술을 흠향하고서 바람이 구름을 걷듯이 재앙을 말끔히 제거하여,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신음하는 소리가 다 없어지고 나라가 태평성대의 복을 누리게 하소서.”

 

□ 서천읍 여단

 

여단이 설치된 곳은 오석사거리에서 서천고등학교 방향 고갯길을 오르다 보면 왼쪽에 테니스장이 조성돼 있다. 테니스장 옆에 나 있는 길을 이용해 서천읍 진산인 오석산을 오르다 보면 정상부에 원형이 잘 보존된 여단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오석산에 조성된 여단은 등산로가 여단 내 제단 쪽으로 나 있지만, 원형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이에 대해 박수환 향토사학자는 “원형이 잘 보존된 만큼 여단에 자생하는 나무를 제거하고 추가적인 여단 훼손을 막기 위해 여단을 통과하는 등산로를 우회하거나 펜스를 설치해 사람들의 진·출입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여단의 규모에 대해 박수환 향토사학자는 “문헌에 따르면 정사각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2장 1척(약 6.3미터)이고, 높이는 2척 5촌(0.75미터)이며, 사면에 흙으로 담을 쌓아 제단을 보호했는데 한 변의 길이는 15미터에 달한다. 문은 남쪽으로 냈다“고 밝혔다.


박수환 향토사학자는 서천읍 여단 축조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서천군 치소가 남산 남쪽 아래에서 오석산 자락으로 옮겨온 것이 세종 4년 1422년인 점을 고려할 때 그 직후에 여단을 설치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고 밝혔다.

 

□ 한산면 여단


한산면 여단은 기산면 영모리에서 봉서사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좌측 주차장 위 고개 정상에서 왼쪽에 있는 건지산 정상부(한산면 죽촌리 산 14번지)에 있다.

 

한산이씨 묘소 위에 설치된 한산읍 여단은 훼손된 흔적이 없다. 여단 한 변의 길이는 17.5미터, 제단은 가로 7.2미터, 세로 2.3미터였다. 이곳 역시 훼손된 흔적은 없지만, 소나무 등 잡목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 잡목을 제거하고 ‘여단’이란 안내판을 설치하고 민간인들의 출입을 통제해 보존할 필요성이 있어 보였다.

 

한편 비인면에도 여단이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수환 향토사학자에 따르면 비인중학교 뒤쪽에 여단이 있는 것으로 고지도에 나와 있다. 박수환 향토사학자는 물론 조사자도 여단 존재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는데 추후 조사를 통해 확인할 예정이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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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서천읍 오석산 여단 (여단 일부가 등산로로 이용되어 훼손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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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성황신을 따라 여단에 들어온 잡귀들은 사진 위 여단 정상에 나 있는 문을 닫아놓으면 빠져나올 수 없다. 

여단 위쪽에는 문 역할을 했던 돌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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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오석산 여단을 처음 발견했던 박수환 향토사학자가 여단에 대해 뉴스서천 취재진에게 설명하고 있다.

(뉴스서천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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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한산 건지산 여단(다음지도 캡쳐)


기록개요

기록명서천군 여단(厲壇)기록방법글, 인터뷰, 사진, 동영상
마을명서천읍 오석산, 한산면 건지산시대조선 중기 이후
개요조선조에 군, 현별로 잡귀를 불러 모아 제를 지내던 여단이 조성됐는데, 현존하는 서천군 내 여단에 관한 기록검색어#오석산여단제, #한산군, #비인군, #서천군,  #봉서사, #한산여단제
수집 및
생산자료
생산 자료 : 사진 3장, 동영상 2개제보자박수환 향토사학자(전 한산면장)
기록자고종만기록기간2023. 4. ~ 2023. 8. / 2023. 11. 30.
관련사업서천읍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관련기관서천군 농업기술센터, 서천 중심지 지원센터,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마을기록 원본 -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혹은 '서천군청 자치행정과 교육지원팀' 문의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이 기록은 1990년대 서해병원이 ‘문화가 살아 있는 고장만들기’ 일환으로 기획 운영한 문화행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서해병원이 어떤 취지와 내용으로 문화행사를 개최했는지에 관하여 이길용 사무처장의 구술을 바탕으로 정리했음.

서해병원의 ‘문화가 살아 있는 고장만들기’ 문화행사 연표 ( 조사자기록 )

구분

기간

행사명

장소

1

1992.9.1~9.3

국립현대미술관 

초청전시

서해병원 로비

2

1992.11.10

대전시립합창단 

초청공연

서천군민회관

대강당

3

1993.5.11

국립국악원초청공연

서천군민회관대강당

4

1993.8.19

서울레이디스싱어즈 

초청공연

서천군민회관

대강당

5

1994.11.14(월)

오후7시

국립합창단초청공연

서천군민회관

대강당

6

1995.5.3~5.4

국립중앙박물관

초청전시

서해병원 로비

7

1995.5.3~5.4

분재작가 김재완

초대전

서해병원 정원

8

1995.12.14(목)

오후7시

국립합창단초청공연

서천군민회관

대강당

9

1996.6.15.(화)

오후7시

국립합창단초청공연

서천군민회관

대강당

10

1997.9.9.(화)

오후7시30분

국립합창단초청공연

서천군민회관

대강당

11

1998.6.18(화)

오후7시30분

국립합창단초청공연

서천군민회관

대강당

12

2000.4.20(목)

오후7시30분

국립합창단초청공연

서천군민회관

대강당

13

2001.6.13~6.16

찾아가는 미술관 

초청전시

서해병원 로비

14

2001.11.22(목)

오후7시

국립합창단초청공연

서천군민회관

대강당


[ 서해병원 문화행사 취지와 어려움 ]

 

조사자 : 사전에 주신 자료를 가지고 정리를 해보니까 92년도 9월이 첫 행사였더라고요. 국립현대미술관 초청전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14번째 2001년도 11월 22일 국립합창단까지 그렇게 많더라고요. 행사 연표 정리한 걸 보시면서 서해병원이 진행했던 ‘문화가 살아있는 고장만들기’로 어떤 행사들이 있었는지 한번 천천히 기억나는 대로 좀 말씀을 한번 해주시면 어떨까요?

구술자 : 당시 지역의 유일한 병원급 의료기관으로서 지역사회 의료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하는 생각에서 추진한 것이 문화행사였어요. 지역에도 문화 활동하는 분들도 있지만 농촌지역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전시, 공연 쪽에 대한 갈증이 좀 있었어요. 당시 병원장님께서는 굵직한 국립단체들이 진행하는 질 좋은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조사자 : 섭외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구술자 : 어려웠죠. 그분들이 이런 군 지역까지 다니기에는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굉장히 공을 많이 들인 걸로 알고 있어요.

조사자 : 첫 행사가 아마 국립현대미술관이 왔던 것 같아요?

구술자 : 네. 병원 로비에서 했어요. 병원 로비와 복도에 파티션을 설치하고 전시를 했어요.

조사자 : 진료 대기 환자들도 전시를 관람하셨겠네요?

구술자 : 그렇죠. 1층 전체에 전시를 했어요. 치료하면서 대기하는 환자들 보고 또 오후 시간에 일반인들이 많이 왔고. 특히 학생들 학생 교사 위주의 학생들도 많이 다녀갔고. 그런데 아무래도 미술 분야는 지역주민들에게 호응도라든지 이런 거 볼 때는 피부로 느끼는 행사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방향을 좀 바꾼 것이 공연이었어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아무리 권위가 있어도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격차가 있었던 것 같아요.

조사자 : 여기 내용을 쭉 보니까 굵직굵직한 국립단체들이 많이 왔네요.

구술자 : 그래요. 병원장님이 직접 관계자들한테 읍소를 했죠. 지역에서 왜 이런 고급 공연을 못 보냐 그런 취지로. 비하인드 스토리가 좀 있어요. 정성도 들이고 좀 식사 자리도 만들려고 애를 쓰고. 또 와서 불편한 게 없도록 먹는 거. 자는 거 신경을 많이 쓰고. 이렇게 공을 들인 측면이 많아요.

조사자 : 지금이야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도 많고 단체들도 많고 예산 지원도 많은데, 비용도 많이 들었겠네요.

구술자 : 예, 많이 들었어요. 그분들께 공식 출연료는 주지 않았지만, 출연료에 상응하는 비용이 들어갔죠. 무슨 대가를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먹고 자고 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히 부담하는 걸로 알았으니까. 그렇지만 이 시골까지 와준 데 대한 고마움으로 불편함을 최소화시키도록 비용이 들어가는 것은 다 감수를 했죠.

조사자 : 그런데 대개 보면은 국립기관들이 한 지역을 3~4번 오는 경우는 이례적인 것 같아요. 국립합창단은 여러 번 다녀갔더라고요.

구술자 : 그렇죠. 그게 합창단 측에서 서해병원 이상용 병원장 정성에 답한 것도 있고, 단원들도 호응도 좋았어요. 공연장이 항상 꽉 찼으니까. 어쨌든 국립합창단 입장에서 시골이라는 여러 여건상 쉽지 않았었겠지만 주민들이 좋아하는 모습에 감동해서 계속 노력을 해줬어요. 다행히.

조사자 : 92년도부터 2002년도까지 횟수로 보면 14번 정도 되는데.

구술자 : 거의 10년.

조사자 : 그 이후에 행사가 계속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데, 특별한 이유들이 있나요? 제가 보기에는 10년 동안 마중물 역할을 충분히 해놓았다는 생각도 있으셨던 같아요.

구술자 : 음....

조사자 : 자발적인 어떤 팀들이 움직인 것 같기도 하고 서해병원의 역할이 충분히 됐다라고 생각을 하셨던 것 같기도 하고. 또 특별한 어떤 사유가 좀 있으신가요?

구술자 : 어쨌든 인구 감소에다가 의원급 의료기관 경영이 조금 원활치 않다는 것이 1번이고, 둘째는 공연장 시설에 대한 국립합창단 단원들의 불만도 많았다고 해요. 당시 서천군민회관, 지금은 문예의 전당으로 바뀌었죠. 대부분 그곳에서 공연이 이루어졌는데, 그런 말들이 나왔어요. “이거 빨리 개선해라. 이게 우리가 공연할 수 있는 환경, 음향이냐?” 하여튼 그런 예민한 부분들을 계속 그동안 얘기를 했지만 개선 안된 데서 기인한 면도 조금 있고. 병원 운영상의 애로사항도 발생했고, 당시 환경이 그렇게 됐어요.

조사자 : 그러셨겠네요. 그러니까 ‘문화가 살아있는 고장을 만든다’는 기본 취지로 10년 동안 애써서 해오셨고, 경영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제 그 역할은 다른 팀이나 다른 사람들한테 넘긴 거로 보시면 되겠네요.

구술자 : 그렇죠. 이제 일단은 초기에 이렇게 이 정도로 자리 잡았으면 이제 군 차원에서도 아니면 다른 기업 차원에서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기대도 있었고. 제일 큰 어려움은 병원 경영 사정이 안 좋아서 그쪽까지 눈을 돌리기가 어려웠다고 이해하면 되겠네요.


[ 서해병원 문화행사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 ]

 

조사자 :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 지역에 미친 영향이랄까 이런 것들이 있으실까요? 첫 행사인 국립미술관이나 합창단 공연 시 교사들 인솔하에 학생들이 많이 왔다고 했는데 어떤 교육적인 측면이나, 지역 주민들의 문화 향수권이나 문화 복지 이런 쪽에 대한 측면에서 의미가 컷을 것 같은데요. 처장님께서 보시기에 어떤 효과가 가 있으셨던 것 같아요?

구술자 : 교육계 쪽에서 어려운 행사를 해준 거에 대해서 고마움을 많이 표시했어요. 실제로 학생들 위주로 수준 높은 공연을 본 학생들의 정서 함양을 얘기하는 사례가 많았어요. 반면에 일반 대중을 위한 효과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고 봐요. 대중음악 공연이 아니다 보니. 내가 알던 노래를 해주는 가수가 왔다는 거 하고 옛날에 어렴풋이 책에서 보던 그런 클래식한 음악을 하는 거하고 감각이 다르니까 일반 대중들은 ‘뭔가 했어’ 이 정도 수준이었어요. 전문가들 지식인들은 좀 달랐어요. 아직도 기억을 해주고 계신 분들이 많아요.

조사자 : 교육적인 측면에서는 학생들한테는 분명한 효과가 있었다라고 보시는 거고, 일반 주민들 중에서는 선호층에 따라 효과가 조금 달리 있기는 있었던 것 같다는 말씀이네요. 당시 서천지역에 문화행사에 대한 저변을 넓힌 효과는 확실하네요.

구술자 : 교사, 학생, 지식인들은 아직도 그걸 얘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기억을 해주고.

조사자 : 어쨌든 국립단체들이 왔고. 국립합창단, 국립국악원도 있었고, 지방의 중소규모로 활동하는 소중창단도 있었네요. 미술 전시, 그다음에 음악공연이 주로 이루어졌는데, 여기 특이한 것으로 지역 작가 초대전을 같이 했던 적이 있네요. ‘분재작가 초대전’ 이건 무슨 내용인가요?

구술자 : 아, 예. 이거는 서천군 소재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오래 잡으시고 교장으로 퇴임하신 김재완 선생님 초대전이었어요. 선생님이 소장하고 있는 골동품도 있고 옛 동전, 서화 등 소장한 게 있었어요. 특히 분재에 조예가 깊으셔요. 주민들과 공유하겠다는 뜻으로 전시회를 함께 연 거죠.

조사자 : 지금 기산면에 식물예술원하시는 원장님이시죠?

구술자 : 예. 맞아요. 하고 계셔요.

조사자 : 지역에서 국립단체 위주로 행사 진행을 하긴 했지만, 지역에서 활동하시는 작가들한테도 참여 기회를 열어주신 거네요.

구술자 : 병원장님 자체의 성향이 그런 쪽을 좋아하셨죠. 본인이 직접 악기도 다루고 인근에서 조그마한 음악회 모임을 결성해서 연주회도 하고 원래 문화예술 쪽으로 관심이 많은 분이다 보니까 다양하게 접근이 된 거죠.

조사자 : 당신이 좋아하시는 거였기 때문에 이런 행사가 기획돼서 추진 된 거네요.

구술자 : 그런 요인이 상당히 있죠. 문화 쪽에 문외한이면 이런 걸 쉽게 구상하기 어렵죠.

조사자 : 여기 자료들이나 어디 잡지에 실렸던 기사자료들 보면, 지금 처장님 말씀하셨던 것처럼 서해병원이라는 한 개의 기업체가 지역의 문화행사를 왜 추진했는지에 대한 취지나 바람들이 좀 담겨 있는 것 같아요.

구술자 : 이런 행사를 일반 직원들이 주도해서 추진하는 건 쉽지 않았을 거고 병원장님의 성향이나 의지가 중요한 역할이 됐다고 보시면 돼요. 우리가 비록 서천이라는 바다를 낀 농어촌 지역에 살고는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지역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눈을 좀 크게 돌리자는 뜻이었어요.

조사자 : 당시만 해도 서천군 인구가 10만, 7~8만 정도였었나요? 지금은 5만 아래 떨어졌지만.

구술자 : 지금은 이제 5만 이하로 내려섰고요.

조사자 : 그렇죠. 인구 규모에 따라서 그 지역의 문화 여건이나 문화인프라가 작동되는 게 좀 달라지잖아요. 당시 상황하고 지금 상황하고 다르죠.

구술자 : 그렇죠.

조사자 : 당시에는 이런 것들을 하는 기업체도 없었고, 이런 움직임도 없었는데. 서해병원이 앞서서 출발한 것은 마중물 역할은 한 거죠.

구술자 : 지금부터 30년 전에 이런 구상을 했다는 것 자체는 좀 인정 해줘야죠.

 

[ 서해병원 설립 과정 ]

 

조사자 : 서해병원이 설립된 과정이 궁금해요.

구술자 : 병원 설립 과정이요. 1988년도 당시 정부에서 전국민의료보험을 실시한다고 정책을 발표했어요.

조사자 : 1988년도요?

구술자 : 예, 그런데 당시 전국에서 의료보험을 실시하는데, 병원급 의료기관이 없는 도시가 전국에 36개가 있었어요.

조사자 : 36개 지역이요?

구술자 : 36개 군, 소위 말하면 낙후된 곳이죠. 의원하고 병원은 일반 사람들이 잘 구분을 못하는데, 의원은 구멍가게로 본다면 병원은 최소한 슈퍼마켓 이상의 역할을 하는 거기 때문에 그 차이가 크죠. 그래서 병원이 없는 전국 36개 지역에 정부에서 의료 인력지원, 세제 지원, 건축비 지원, 몇 년간 소득세 감면 네 가지 큰 혜택으로 설립자를 모집했어요. 모집한 곳 중 26개는 스웨덴처럼 개인들이 신청해서 설립하게 됐고. 나머지 10개소는 청양이랄까 태안이랄까 이런 데는 군립의료원이 생겼죠. 우리 같은 데는 26군데가 생긴 걸로 알고 있어요.

조사자 : 서천군도 26개 지역에 속하네요.
구술자 : 그러니까 정부 지원으로 설립이 된 병원이죠.

조사자 : 당시 자료에 보면 의료 취약지 민간병원이라는 기사들이 있는데....

구술자 : 의료 취약 지역. 그러니까 군 단위 중에서 병원급 의료기관이 없는 지역에 정부 지원으로 병원이 설립된 거죠.

조사자 : 1988년도에?
구술자 : 1986년부터 설립자 모집해서 1988년도에 오픈을 했어요.

조사자 : 1988년이면, 당시 서천지역에 홍수가 있었던데, 건축 과정에 문제가 없었나요?

구술자 : 있었죠. 건축물 뒷부분에 기초가 쓰러져서 거기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것 때문에 부등침하가 생겨서 병원에 누수된 흔적이 아직도 있어요. 건축 당시에 그랬죠. 기초에 문제가 생긴거죠.

조사자 : 원천적으로 다시 할 순 없는 상태였구요?

구술자 : 그러기에는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무리가 많아서 건축사 도움을 받아서 기초 형태를 바꿨어요. 그래도 뒷부분 램프 지역에 부등침하가 생기면서 비틀림 현상으로 일부 미세한 균열이나 크랙이 생기는 거죠.

조사자 : 지금은 건축 당시하고 변경된 곳이 있나요? 혹시 그 구조 자체가 크게 바뀌었다든지?

구술자 : 증축을 두 번 했어요.
조사자 : 그럼 현재 몇 평 정도 되는 거죠?
구술자 : 현재 약 1500평 정도 돼요.

조사자 : 당시 자료 사진들을 보면 정원이 참 예쁘게 꾸며졌더라고요. 건축하면서 정원에 특별히 강조를 주셨던 이유가 있으셨나요?

구술자 : 공을 많이 들였어요. 흙도 정원수에 맞는 흙을 구하기 위해서 조사하러 다녔으니까요. 나무를 키우기 좋은 배수가 잘되는 마사토를 갖다 넣고 했죠. 그때나 지금이나 나무 한 그루를 캐다 이식해서 관리하는 비용이 훨씬 많이 들어요. 그 당시에 건축비가 6억이었는데, 아마 기억에 2억 이상 정원에 들어간 거 같이요.

조사자 : 거기에 간접비용까지 따지면 훨씬 더 들어갔겠네요?

구술자 : 그렇죠. 그 후로도 계속 유지 관리 비용이 적지 않게 들어갔죠.

조사자 : 정원에 그렇게 공을 들이셨던 건 아무래도 병원이기 때문에 환자분들에게 편안하고 정서적인 치유 환경을 고려하셨던 건가요?

구술자 : 그렇죠. 진료실에서 이루어지는 진료 행위 말고 외적인 치유 방법 중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은 것이 정원이었어요. 휴식과 건강.. 나중에 직원들이 정원에서 결혼식도 하고 음악회도 하고 했죠.

조사자 : 맞아요. 저도 아이들하고 찍은 사진 있어요.

구술자 : 주변에서 사진 촬영을 위해 방문하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세월이 흘러 지금이야 많이 변형은 됐지만 설립 초기에 병원의 전체적인 운영 방향 중에 문화행사나 정원을 꾸미는 거나 다 연결이 돼 있는 거죠.

조사자 : 처장님의 말씀이 문화행사 자료나 사진들 보면 그대로 다 보이네요. 오늘 바쁘신 시간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는 병원을 두 번 증축하다고 하셨는데, 증축 시기별 서천지역의 의료환경 변화 등에 관해서도 한번 여쭤봐야 할 것 같아요. 그때도 시간 한 번 부탁드리겠습니다.

구술자 : 그래요. 지금의 서해병원은 의료법인화되고 설립자도 안 계시지만, 옛날 행사 이야기하다 보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네요. 다음에 또 한번 봅시다.

조사자 : 네네. 오늘 수고하셨어요. 다음에 또 꼭 뵙겠습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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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서해병원(A. 서천읍 서천로184)과 서천문예의전당(B. 서천읍 서천로14번길 20)_당시 서천군민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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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 2>  서해병원연보에 실린 문화행사(19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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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서해병원문화행사 연표와 팜플릿을 살펴보고 있는 이길용 사무처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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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국립현대미술관 초청전시(1992.9.2), 병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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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국립현대미술관 초청전시(1992.9.2.), 병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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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3> 대전시립합창단 초청공연(199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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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4> 대전시립합창단 초청공연(199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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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5> 국립국악원 초청공연(1993.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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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6> 국립국악원 초청공연(1993.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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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7> 서울레이디스싱어스 초청공연(1993.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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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8> 서울레이디스싱어스 초청공연(1993.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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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9> 국립합창단 초청공연(199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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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0> 국립합창단 초청공연(199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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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1> 국립중앙박물관, 분재작가 초대전시 (1995.5.3.~199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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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2> 국립중앙박물관, 분재작가 초대전시 (1995.5.3.~199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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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3> 국립합창단 초청공연(199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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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4> 국립합창단 초청공연(199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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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국립합창단 초청공연(1995.12.14), 병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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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국립합창단 초청공연(1997.9.9.), 병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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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5> 국립합창단 초청공연(199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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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6> 국립합창단 초청공연(199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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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7> 국립합창단 초청공연(1998.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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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8> 국립합창단 초청공연(1998.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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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 국립합창단 초청공연(1998.6.18), 병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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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7> 국립합창단 초청공연(1998.6.18.), 병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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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9> 국립합창단 초청공연(1999.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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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0> 국립합창단 초청공연(1999.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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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1> 국립합창단 초청공연(20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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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2> 국립합창단 초청공연(20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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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3> 국립합창단 초청공연(200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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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4> 국립합창단 초청공연(200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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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8> 서해병원 신축조감도(1987), 서해병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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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9> 서해병원신축 전경(1988), 서해병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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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0> 서해병원 정원 연못 분수(1988), 서해병원 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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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1> 서해병원 연못에서 아들과 함께한 이길용 사무처장(1988), 서해병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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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2> 서해병원 설립 당시 세워진 원훈석, 서해병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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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3> 정원으로 옮겨진 서해병원 원훈석(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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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5> 1992년 발행한 서해병원연보 표지 및 내지 일부( 1993.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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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4> 서해병원 외부 전경(2023)


기록개요

기록명1990년대 서해병원의 문화행사기록방법글, 녹음, 사진
마을명서천읍 사곡리시대1992 ~ 2001년
개요서천읍 사곡리 소재 서해병원에서 1992년도부터 2001년까지 14차례에 걸쳐 진행했던 문화행사와 관련된 기록검색어#서해병원, #문화행사, #국립합창단, #국립국악원, #국립현대미술관, #분재작가, #의료취약지민간병원, #군립의료원, #의료보험, #정원, #치유환경, #서천군민회관, #서천문예의전당
수집 및
생산자료
수집 자료 : 팜플렛, 연보 총 25쪽, 사진 11장
생산 자료 : 그림 1점, 사진 3장
제보자이길용(남, 1954년생, 서해병원 재단사무처장)
기록자김석환기록기간2023. 9. 1. ~ 2023. 11. 29.
관련사업서천읍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관련기관서천군 농업기술센터, 서천 중심지 지원센터,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마을기록 원본 -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혹은 '서천군청 자치행정과 교육지원팀' 문의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구 군청사거리에 위치한 ‘협심양복점‘ 간판이 보이는 흑백사진을 가지고, ’협심세탁소·협심양복점‘ 운영자를 만나서 면담했다. 흑백사진은 1974년도 것이고, 예소아카이브에서 제공했다.

1. 흑백사진의 상황

흑백사진 속에 한복 입은 여성들과 양복 입은 남성들이 길 위를 걷고 있다. ‘협심양복점’ 간판 위에 ‘예식장’ 간판이 보이므로, 사람들이 2층에 있는 예식장에 온 하객들로 보인다. 사람들 옆으로 트럭과 오토바이가 뒤섞여 있다.

 

2. 협심양복점 운영

현재 ‘협심양복점’(서천읍 군사리515-2 / 서천로 79)을 운영하고 있는 제보자는 이 양복점을 1980년도부터 운영했다. 제보자는 이전부터 운영되던 ‘협심양복점’을 이어받았다. 제보자는 17세쯤인 1969년에 협심양복점에서 양복 일을 2년 정도 배웠고, 서울에서도 5~6년 정도 배웠다. 이후 28세가 된 1980년에 양복점을 인수 받았다. 그 당시에 이전 운영자가 25년 정도 운영하던 양복점을 60세가 넘어 계속 운영하기 어려워 제보자에게 인계해주었다.

현재 건물은 1970년대 초반에 지어졌다. 이전 양복점 건물은 단층 건물이었는데, 화재로 소실돼 새로 지어졌다. 서천읍내에 2층 건물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서 2층 건물을 구경하러 많은 사람이 왔다.

 

3. 2층 새한예식장

1970년대에 협심양복점 건물 2층은 예식장이었다. 사진 속에서 예식장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이 예식장은 1980년대 초반에 당시 군청 아래(현, 군청로 39)로 이전하였다. 제보자는 예식장 이름이 ‘비둘기예식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예소아카이브에 따르면, 비둘기예식장을 운영한 오문근 사진사가 협심양복점 건물 2층에서 운영한 예식장은 ‘새한예식장’이었다.

 

4. 스마트 양장점

흑백사진 속에서 협심양복점 옆에 ‘스마트양장’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이 ‘스마트양장점’은 여성 맞춤복을 만들어 판매하는 곳이었다. 서천읍내 다른 곳에 있다가 이사 와서 운영되었으나, 80년대 초에 문을 닫았다.

 

5. 서천신용금고

제보자는 1970년대에 군청사거리에 있던 ‘서천신용금고’를 기억했다. 현재 서천읍 군사리513-6(서천로 81-1) 2층에 신용금고가 있었으며, 3명 정도가 근무하고 있었다.

 

6. 협심양복점 옆 건물

협심양복점 옆 건물(현 보석나라, 군사리 515-1 / 군청로 24-3)은 화재가 난 후에 새로 지어졌는데, 도로가 넓혀지면서 대각선으로 잘리고 안으로 축소되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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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서천군청사거리와 협심양복점(19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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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협심세탁소·협심양복점(2023년 9월)>


기록개요

기록명협심양복점과 군청사거리기록방법글, 녹음, 사진
마을명서천읍 군사리 515-2일대, 구 군청사거리시대1970년대
개요1970년대 서천군청 사거리에 있던 협심양복점과 주변 건물에 대하여검색어#서천, #70년대, #양복점, #서천군청, #군청사거리, #스마트, #양장점, #새한예식장, #비둘기예식장, #서천신용금고
수집 및
생산자료
수집 자료 : 사진 1장(예소아카이브 제공)
생산 자료 : 녹음 파일(15분), 사진 1장
제보자최명호(남성, 1953년생, 현 협심세탁소·협심양복점 대표)
예소아카이브
기록자신재원기록기간2023. 09. 01. ~ 09. 10.
관련사업서천읍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관련기관서천군 농업기술센터, 서천 중심지 지원센터,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마을기록 원본 -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혹은 '서천군청 자치행정과 교육지원팀' 문의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조사자에게 가르매(가릇메)는 정겨운 곳이다. 그곳은 선산이 있었고, 내게 다정다감했던 둘째 고모 댁이 있었다. 고모 내외분이 돌아가신 후 사촌들은 모두 서울로 떠났다. 추억의 동네 고모네 집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궁금한 마음에 가르메 고모네 집이 있던 곳을 찾아가 보았다. 대문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었고, 토방과 마루 그리고 볏집들이 있었던 시골 농가였는데, 그 터에는 슬라브로 된 양옥집으로 바뀌었고, 마당에도 대문 앞에도 꽃들로 예쁘게 가꿔 놓은 풍경이 농가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모네 옆집 굵직한 나무 대문이 반쯤 열려있어 안을 들여다 보니 마당에 가마솥도 걸어놔 있고 젊은 여자분이 밖으로 나왔다.

그 집에는 할머니 한분이 살고 계시고, 젊은 여자분은 요양보호사였다. 할머니는 옆집 살았던 우리 고모네를 기억하셨다. 할머니와 대화하는 중 50년전 의정부에서 이곳으로 이사온 후 비닐하우스를 처음으로 만들어 농사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에게 비닐하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할 것을 승낙 받았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대전에 사는 막내딸이 내려와 있어서 비닐 하우스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삼산리 비닐하우스에 대하여]

박선비는 1936년생이고 고향은 함경도 은율군이다. 6·25 한국전쟁 때 부모님 따라 피난 왔고, 동향인 조석겸과 결혼했다. 의정부에서 50년 전 이곳으로 이사를 하고 정착했다.


의정부에서 가르메로 이사오다.

조사자 : 의정부에서 이곳으로 이사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곳에 지인이 있었나요?

구술자1 : 아니, 의정부서 우리 할아부지가 동생들이 다 여기있다구 이리로 이사온다구 허니 으트게

조사자 :  지금까지 주로 무슨 일을 하셨어요?

구술자1 : 농사졌어, 땅이 많아. 요 앞이 전부 우리 땅여, 거기다 하우스를 지었어 일곱동(7동)인가? 여덟동(8동)했어, 많이 했지.


삼산리 비닐 하우스 시작

조사자 : 일곱동(7동) 여덟동(8동) 하시는데, 한동(1동)은 몇평인가요?

구술자 : 50평. 100평짜리는 밭이 길어야 혀. 여기서는 긴 밭이 없어서 50평씩만 혔어.

조사자 :  논과 밭이 많았는데, 하우스 농사를 짓게된 계기가 있나요?

구술자1 : 아이들 공부 가르키고 키우느라고 의정부에서 살 때 하우스를 했어. 해 봤으니까 잘 알지.

조사자 : 언제부터 하우스농사 짓기 시작하셨나요?

구술자1 : 첨에 1~2년은 하우스 없이 농사를 지었어. 그러다가 의정부에서 해봤으니까 여기서도 한번 해보자고 시작한거야. 처음오니까 하우스가 뭔지도 몰라 여기와서 하우스 져주고 그사람들은 재미봤어. 여기 사람만 혀도 자꾸 져달라고 혀서 영감이 많이 져 줬어.

조사자 :  하우스농사 지은 작물로는 무엇이 있나요?

구술자1 : 도마도[토마토], 오이, 참외 지었지. 그때 당시 이 주변 땅 주인이 부도나서 내 놓은 걸 할아버지가 다 샀어. 한 1500평 정도 돼 지금도 그대로 있어. 그 땅 사가지고 농사졌지 거기다 하우스 8동 진거여.

조사자 : 의정부에서도 하우스에서 도마도, 오이, 참외 농사 지으셨나요?

구술자1 : 의정부에서는 수박이랑 참외를 했어. 그런데 여기선 못했어. 여기는 팔로가 없어서 힘들어. 도매상이 없어. 입찰넣는 대가 없어 그래서 군산가서 입찰 넣어 보니께 헛것이여. 그래서 안했어.

조사자 :  왜 군산에 가니까 헛것이었나요?

구술자1 : 싸~ 돈이 안돼. 의정부에서는 수박도 많이 하고 참외도 많이 했어. 경기도에서는 응암동 시장에나 수유리 시장으로 가져가면 금방 팔리거든, 근데 여기서는 판로가 없어 입찰하는대도 없구. 대량으로 할 수가 없어. 그래서 도마도 오이만 혔어. 대구상회(서천읍)에 다 넘겨줬어. 대구상회는 지금도 있어.


하우스 농사 판로

조사자 : 대구상회에 넘겨주면 와서 가져가나요?

구술자1 : 그때는 오토바이 타고 가져가. 그때는 그 사람들도 차가 없었어. (서천)시장에 채소장사도 12명 밖에 안됐어. 그 사람들한테 넘겨주고, 찌거기는 내가 다 팔았어.

조사자 : 어떻게 파셨나요? 장날에 가서 파셨나요?

구술자 : 장날에 가서 팔어 그때는 배추가 없으니까 다 팔려

조사자 : 채소장사들 12명이 채소를 가지러 오나요?

구술자1 : 넘겨 달라면 넘겨 주고, 그때 혼자 시장이서 장사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00네 집여. 배추를 가져갔는데 배추값을 냉큼 안줘.


하우스에서 재배하는 농작물들

조사자 : 도마도, 오이 외에 또 어떤 작물농사를 지었나요?

구술자1 : 다른 것은 거의 하지 않았어. 꽃도 해봤어, 안 됐어. 지금은 졸업식때 꽃을 사가지고 가지만, 그때는 없었어. 먹는게 최고야

구술자2 : 아버지가 국화도 했었고, 백합도 해 봤어 버섯도 했었는데, 소비가 안됐어요. 열무, 고추 오이와 도마토는 기본이고 다른 작물들 여러 가지 했었어요. 겨울에는 상추도 하고 고추모를 많이 해서 우리도 쓰고 팔기도 했어요.

하우스에서 재배하는 농작물 씨앗준비

조사자 : 하우스에 농사를 지으려면 종자는 어떻게 했나요? 씨앗을 집에서 보관했나요?

구술자1 : 씨앗은 종묘사에서 사야되, 전화만 하면 보내줘

구술자2 : 지금은 플라스틱 씨앗함이 있잖아요. 지금도 기억나는 게 옛날에 우리 방학때면 아버지가 신문지 오려서 동그랗게 말아서 컵을 만들어 놨어. 거기다 흙을 담은 담에 씨앗을 싹을 키워. 하우스안에다 겨울에 키워가지고 봄에 심는거야. 씨앗부터 해가지고 팔기까지 다 아버지가 하시는 거지. 그 다음에 비닐이 나와서 비닐로 하고, 요즘엔 검은 컵이 나와서 거기다 하니까 편하지

구술자1 : 신문지로 할때는 신문지 채 그냥 심는데, 비니루는 뽑아야 돼. 신문지는 물주면 없어지니까. 별짓 다하고 살았어.

조사자 : 하우스 농사에 특별한 농기구가 있었나요?

구술자 : 특별한 것은 없었어. 소가 땅을 갈아 줬어. 마을에 한 사람이 만날 갈았어. 50평 가는데 3만원씩 줬어. 한 10년동안 갈았어. 나중에 기계가 나와서 금방 갈아 버리더라고 로타리 치는 기계.


비닐 하우스의 변천

처음에는(46년전) 하우스 파이프가 안 나올 때라 각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옆에는 판자로 막고, 지붕은 대나무를 엮어 만든 허술한 하우스였다고 한다. 의정부에서는 철사로 틀을 만들었는데, 이곳에는 철이 없어 각목으로 틀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약10년쯤 지난 후에 가느다란 파이프가 나왔고, 오늘날과 같이 튼튼한 여러종류의 파이프들이 나왔다. 하우스를 감싸는 비닐도 널빤지에서 비닐로 점차 두꺼운 비닐로 발전했다.

겨울을 나기 위해 큰 하우스에다 위에다 부직포를 씌운 다음에 안에다가 양쪽으로 반을 갈라서 거기다가 부직포를 또 씌워놓는다. 비닐을 씌우고 부직포를 세 번만 씌우면 얼지 않는다고 한다. 눈이 많이 덮인 때는 눈 녹아 내리라고 연기를 피운다. 50평 하우스에는 3곳에 화덕을 놓고 화덕에 맷재를 피우면 연기가 나는데, 연기를 내면 눈이 녹아내린다고 한다.

 

조사자 : 하우스 농사에서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요?

구술자1 : 하우스가 주저앉았을 때가 많았다. 옛날에는 눈이 많이 왔어. 그때는 철이 든든하지 않아서 주저않을 때가 많았어. 고생많이 했어. 처음에는 나무로 했어. 철로 틀이 없었거든 그때는. 차차 틀이 생기면서 철로 했지.


1년 수입

조사자 : 1년 수입은 어떠셨나요? 많이 남았나요?

구술자1 : 애들 먹이고 키우구 학비주구 하는데 쓸 정도였지. 남는게 어디가 있어. (웃음)

구술자2 : 옛날에 엄마가 시장 다녀오시면 앞치마에 돈이 이렇게 두둑해 가지고 우리가 밤에 그거 세느라고 재미있었어요.

구술자2 : 밭안에 큰 창고가 있어서 아버지가 농사 짓던 도구들이 있었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얼마 있다 창고에 불이나서 다 탔어. 거기 안에 아버지 쓰던게 별개 다 있었는데 다 탔어요.

 

※ 구술자1의 남편이자 구술자2의 부친은 3년전 92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 하우스 농사는 대부분 부친이 지으신 터라 부친의 생활터전이요 생업 도구들이 화재로 소실된 것에 대해 못내 아쉬워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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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동의서에 싸인하는 박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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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박선비 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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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박선비 자택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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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현재 남아있는 박선비의 비닐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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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박선비의 집 앞 논>


기록개요

기록명삼산리 최초 비닐하우스기록방법글, 사진, 동영상
마을명서천읍 삼산1리 가르메(가릇매)시대1970대
개요삼산리 최초 비닐하우스 설치와 사용 용도(1970년대)검색어#농업, #비닐하우스, #여성, #하우스작물
수집 및
생산자료
생산 자료 : 사진 5개제보자

박선비(여성, 1936년생, 삼산1리 가르메)

조순덕(여성, 50대, 박선비의 딸)

기록자홍성윤기록기간2023. 08. 26. ~ 08. 29.
관련사업서천읍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관련기관서천군 농업기술센터, 서천 중심지 지원센터,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마을기록 원본 -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혹은 '서천군청 자치행정과 교육지원팀' 문의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1991년도에 서천으로 이사 와서 33년째 열쇠집을 운영하는 권학현 사장의 공간과 삶의 이야기를 담았음.


[ 열쇠 수리 요금 ]


조사자 : 안녕하세요. 사장님, 우체통 키 바꾸러 왔어요.

(우체통 열쇠 수리도 할 겸 8월에 약속했던 인터뷰를 시작했다.)

구술자 : 이거는 열쇠 없어요. 그냥 깎아야 해요.

(열쇠 수리하면서 편안하게 말씀을 나누는 게 더 좋다고 그냥 하자고 하셨다.)
조사자 : 협정요금(협정요금표)이 1만원으로 돼 있네요.

구술자 : 지금은 기본으로 2만원이에요.

조사자 : 2만원이 기본이고, 현장 여건에 따라 더 받고 덜 받고 거리에 따라 다르기도 하잖아요.

구술자 : 그럼요. 거리에 따라서 다르죠.

조사자 : 어차피 오가는 시간이 다를 테니까 거리 따라 다르고, 현장 작업조건에 따라 다르고. 한국 열쇠협회가 지금도 있어요?

구술자 : 있어요. 근데 여기는 지방이라서 뒤죽박죽이니까 안 돼요.

조사자 : 중앙에서 하긴 하는데 관리가 안 되니까, 지방별로 조직이 안 돼 있으니까....

구술자 : 그래서 그래요.

 

[ 서천열쇠 상호도용 애환 ]

 

조사자 : 서천에 지금 열쇠 하시는 분들이 몇 집 안 되는 것 같은데요.

구술자 : 세 집이요. 삼거리 쪽에 하나하고, 한솔마트 옆에 금강열쇠.

조사자 : 그렇게 두 곳하고, 사장님. 전에는 더 많지 않았었어요?

구술자 : 전에는 없었죠.
조사자 : 전에도 없었나요?

구술자 : 그럼. 근데 열쇠가 여기 하구둑 생기고 나서, 군산 사람이 우리 상호를 도용해가지고 영업을 자기들이 하는 거야.

조사자 : 서천열쇠라는 거를 가지고요?

구술자 : 군산에 있어도 여기 지인들 있는 사람한테 전화번호를 빌려가지고, 친척 같으면 한 달에 얼마씩 전월세 주고. 우리 상호로 영업을 하는 거요.

조사자 : 전국망인 것처럼요?

구술자 : 그래서 고발을 하려고 내가....

조사자 : 그러셨구나. 근데 그게 어제 오늘 일은 아닐 거 아니에요?

구술자 : 그렇죠. 오래됐죠. 그거 지금 몇 년 됐어요. 내가 이 도장을 팠어. 서천열쇠를 도용해가지고 해서 이걸 내가 (법원에) 접수를 시켰어. 그러니까 서울서 대전 가서 얘기하니까 한 지역에서는.... 그때 이거 5만원 주고 새긴 건데.

조사자 : 그러니까 그 도장을 파셔서....

구술자 : “할 수 있다. 한 지역에서는 두 상호를 가지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광천김 그러잖아요. 광천김 그것도 방송에도 나오더만, 딴 데는 못 하게 돼 있는데 광천김이 다시 신고를 거기서 했는데 이제 그게 해결이 잘 안 된 모양이에요.

조사자 : 서천군에서 서천열쇠를 같은 상호로 해도 된다, 할 수 있다.

구술자 : 군산 사람이 여기 지역에서 우리 서천열쇠를 사용을 해요. 번호는 틀려도 한번은 왜 서천열쇠 전화했는데 딴 사람이 왔냐는 얘기여. 젊은 사람이 그 아들이냐고 나보고 그려. 내가 그래서 알았어요. 군산에서 여기다 사람 세워서 서천열쇠 해놓고 이제 114에다가 돈 좀 올려놔요. 나보고도 돈 주라고 했는데 안 줬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114에서 그 사람한테 넘겨주는 거야. 손님이 전화 오면은. 그래서 내가 그게 좀 괘씸해서 내가 전화로도 한 번 했어요. 장항법원 가서 그걸 물어봤는데 고발하라고 해요. 고발하려면 현장 사진을 찍어야 되고, 증거물이 있어야 된다는 거야. 그것도 골 아픈 거예요. 그렇게 해서라도 해서 벌금을 갖다가 많이 먹이면은 그럼 안 하잖아요.

조사자 : 그렇죠.

구술자 : 근데 50만원이요. 그래서 내가 소용없는 거다, 아예 그냥 포기해버렸어요.

조사자 : 서천에서 가장 오래 33년 동안 하시면서 쌓아놓은 것들을 그렇게 영업적으로 써먹는데도 대책이 없는 거네요. 법적으로도 그렇고.

구술자 : 양심껏 하라고. 안 그러면 해보라는 얘기야. 고발하라는 얘기. 그놈도 이제 다 알아봤겠지.

조사자 : 벌금 맞아봐야 얼마 안 되고, 법적으로 해봐야 크게 문제될 거 없고 하니까.

구술자 : 그렇죠.

조사자 : 그런 애환이 있으셨구나. 올해가 23년이니까 한 5년 전 10년 전?

구술자 : 5년, 10년은 다 될 거야.


[ 서천열쇠 가게터, 그리고 춘장대 호황 ]

 

조사자 : 처음에 시작할 때 이 공간 그대로죠?

구술자 : 저쪽에서 1년 있다가.

조사자 : 저쪽이 어디예요?

구술자 : 옛날 저기 제일주유소 돌아가는 데 커브길이 하나 있어요. 그 건물이 없어졌어요.

조사자 : 거기 문방구(알파) 있는데요?

구술자 : 문방구는 아니고 문방구 지나 커브길 저쪽....

조사자 : 코너. 그럼 반대편 스크린 골프장이 있는데요?

구술자 : 아니, 그 반대편. 내모습사진관 있는 데. 지금은 없어졌지.

조사자 : 거기서 한 1년 하시다가 이곳으로 이사 오신 거네요.

구술자 : 여기 이사 왔는데. 여기가 처음에 집주인이 두부 만들던 데래요. 그다음에 또 집주인이 친구하고 간판하다가 내가 들어왔지.

조사자 : 두부는 누가 하셨었고요?

구술자 : 돌아가셨지.

조사자 : 부모님이 두부 하시다가, 현재 집주인이 친구하고 간판하다가, 사장님 여기 월세로 들어오신 거네요. 그런데 두부 할 수 있는 공간이 안 되는데 안쪽에 공간이 좀 있나요?

구술자 : 두부가 아니고 닭인가 보다. 통닭, 안쪽에 공간이 좀 있어. 지금 창고로 쓰고 있어요. 그 당시에는 열쇠 몇 개 모아가지고서 군산 가서 깎아오고 그랬던 시절이요. 내가 오니까 참 고맙다고 인사도 많이 들었어요.

조사자 : 맞아요. 그때는 사진도 모아가지고 다른 데 가서 현상해 오고 했는데. 열쇠도 모아가지고 군산 가서 깎아오고 그런 시절이었었네요.

구술자 : 문 열고 한 3년 고생 많이 했지. 그때는 일이 없어서 그냥 현상 유지정도였지. 제일아파트 지을 때 상판까지 다 했어요.

조사자 : 열쇠만 하신 게 아니고요?

구술자 : 그때는 다 그렇게 했으니까. 군산에서 건달들 와가지고 돌아다녔어. 지금도 눈에 안 보이게 건달들 댕겨요. 큰 공사 따려고. 내가 아는 사람은 나한테 주고 했지. 암암리에.

조사자 : 열쇠만 가지고는 뭐가 안 되니까 선반 내부 설치하고 그렇게. 어쨌든 건물이 없으니까 아예 그냥 일거리가 없어서 그렇게 고생하셨고, 3년 지나고 나서는?

구술자 : 차츰 발전이 돼서 일거리도 생기고 인구도 늘고 나아졌지.

조사자 : 한참 좋았던 때는 언제예요?

구술자 : 정확한 기억은 어려운데 한 10년 고생하다 춘장대 발전됐을 때 좋았지.

조사자 : 춘장대 발전하고 사장님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서요?

구술자 : 차 키가.

조사자 : 차 키요?

구술자 : 키를 많이 잊어버려. 춘장대 가면 사람들이 키를 주머니에 넣고 재미나게 놀다 보면 이게 출렁출렁해가지고 많이들 잃어버려.

조사자 : 맞아요, 맞아요. 그러면 그거를 어떻게 출장 가요?

구술자 : 출장 가서 현장에서 깎아요.

조사자 : 아 현장에서, 해변 출장소를 하신 거네요?

구술자 : 이거 키 없이 깎았잖아요. 이렇게 그 식으로 가서 차 키를. 그때 가면은 한 3만원씩 받아요.

조사자 : 당시 3만원이면 작지 않은 돈인데....

구술자 : 그때 삐삐 있을 때니까 집에서 마누라가 삐삐 오면 전화해서 어디 있다고 하면 가서 깎고. 하루 세 번씩도 깎고 그랬는데. 그런 때가 있었어요.

조사자 : 여기 일보다 그 일이 더 쏠쏠했겠네요?

구술자 : 그렇죠. 한 철이니까 먹거리도 한철 장사잖아요.

조사자 : 맞아요. 맞아요. 춘장대 말씀은 오늘 처음 들어요.

구술자 : 그때 좀 재미 봤지. 지금은 이제 그런 게 또 없어 거의 번호 키 시대니까.

조사자 : 맞아요.

구술자 : 어쩔 수 없이 시대가 변하니까 따라가야지.


[ 서천열쇠의 미래는 ]

 

조사자 : 앞으로 얼마 정도 더 하실 것 같아요?

구술자 : 지금은 이제 내가 먼 데 출장을 못 나가. 딸이 여기서 사니까 큰 것 같은 거는 이제 딸한테 전화해가지고 같이 가자고 하지.

조사자 : 따님이 어디 사는데요?

구술자 : 서천 신영아파트 살아.

조사자 : 많이 도움이 되시겠네요.

구술자 : 이제 욕심 안 부려요. 욕심부리면 큰일 나요. 마음 비워야지 젊은 시절 같지 않어. 이게 아무리 저거 한다고 해도 나이 먹으면 판단력이 느려져. 정신은 말짱한 것 같은데 또 손발이 따로 움직이기도 하고 그게 그래서 나이 먹으면 사고 나. 노인네들 운전하는 사람들 신호등 앞에서 미리 계산 다 해야 하는데. 사람들 뒤에서 빵빵거리잖아요.

조사자 : 맞아요. 앞에 빨리 안 빼준다고 그러니까. 그러셔도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는 계속 하셔야죠. 물려받을 식구들은 없으시구요?

구술자 : 이거 가게 내놨었어요.

조사자 : 언제요?

구술자 : 금년에 안하려고. 오토바이 사고를 한 번 났거든. 내가.
조사자 : 출장 가시다가요?

구술자 : 춘장대 갔다 오다가.
조사자 : 놀라셨겠네요. 많이 안 다치시구요?
구술자 : 갈비가 몇 개 나갔었고, 한 달 입원하고.

조사자 : 올해요?

구술자 : 올해 봄, 올 봄에. 그러고 내놨었어요.

조사자 : 물어보는 사람은 있어요?

구술자 : 이걸 안 하려고 그래. 지금 사람들은 나이 먹은 사람들 같지 않아. 젊은 사람들은 배워야 하는데 안 하려고 그래요. 지금 젊은 사람들은 전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육신 편하게 하려고 그러고. 그런 세상이라서. 그래서 외국 사람들 많이 오잖아요.

조사자 : 그렇죠.

구술자 : 70년 후반기 80년대에는 우리나라가 다 인력 수출했어. 다.

조사자 : 그랬죠.

구술자 : 근데 우리나라가 그냥 고속으로 발전된 바람에 지금 애들은 고생해 본 게 없어가지고. 먹거리도 고생을 해봐야 하는데. 그런 것들도 전부 눈에 입에 안 맞으면 할 생각 안 하고 안 먹고 편하게.... 또 부모가 내 새끼 내 새끼들 해서 저 하나밖에 없으니까. 학교도 선생들 갖다가 저거 하고 그런 현상 나와요. 옛날에 우리 클 때는 뭐라고 하면, “선생님한테 말 잘 들어야 되는 법이야.” 부모가 이렇게 하는데. 지금은 부모가 누가 어떻게 해서 선생이 뭐 때문에 그러냐고 바로 전화해요. 협박하고 그러니까 선생님들 자살하고 그러잖아요. 세상이 이렇게 뒤집어 졌어.

조사자 : 어르신 입장에서는 뒤집어진 거라고 하는데 지금 아이들 생각은 다르잖아요.

구술자 :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렇게 된 게 전부 너무 빨리 발전됐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도 천천히 가야 돼요. 너무 고속으로 가려니까 사람들이 인내심이 없어진 거예요. 인내심이 그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사람 제일 짧아요. 발전은 빨리 됐지만 이런 문제가 생긴 거예요. 아주 빵점이거든.

조사자 : 열쇠 이야기하다가 요즘 아이들 교육 걱정, 청년들 걱정까지 말씀 주셨네요. 오늘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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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서천열쇠집 위치도(서천군 서천로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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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서천열쇠 외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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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서천열쇠 내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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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열쇠 제작 모습(2023. 0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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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열쇠 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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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다양한 열쇠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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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 번호키의 시대 도래 제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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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7. 전자식 번호키의 시대 도래 제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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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8. 빛바랜 협정요금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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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9. 전자도어록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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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0. 서천열쇠 상호도용 고발하려고 새긴 도장을 보여주시는 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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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1. 경찰청 산하 (사)한국열쇠협회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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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2. 사장님의 세상 걱정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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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3.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열쇠 제작 기계>


기록개요

기록명서천열쇠집기록방법글, 녹음, 사진
마을명서천읍 군사리시대1991년~현재
개요서천읍 군사리 서천읍행정복지센터 옆에서 33년간 열쇠집을 운영해 온 권학현 사장의 공간과 삶의 이야기검색어#서천열쇠, #열쇠수리, #춘장대, #삐삐, #상호도용
수집 및
생산자료
생산 자료 : 그림 1점, 사진 13장제보자권학현(남, 1941년생)
기록자김석환기록기간2023. 8. 1. ~ 2023. 11. 29.
관련사업서천읍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관련기관서천군 농업기술센터, 서천 중심지 지원센터,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마을기록 원본 -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혹은 '서천군청 자치행정과 교육지원팀' 문의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

기록내용

고살메에서 갈꽃비 매는 동네 가정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지금은 2~5가정만이 갈꽃비를 맨다. 그 분들 중에서도 김종덕은 갈꽃비 매는 일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빗자루를 매기 위해서는 갈꽃을 준비하는 것이 필수다.

김종덕의 집에 가면, 갈꽃을 마련하는 과정을 제보받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갈꽃을 마당에 널어 말리는 풍경’, ‘말린 갈꽃을 보관해 놓은 풍경’, ‘갈꽃을 담아오는 보자기나 자루는 어떤 것인지’ 등등과 올해 비가 많이 왔는데 갈꽃 상태는 예년에 비해 어떤지? 구입양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등등을 사진에 담고 싶어 연락을 취했다.


[ 고살메 마을 김종덕과의 면담내용 ]

김종덕은 올해 75세(1949년생)로 고살메가 고향이고 평생을 고살메에서 살면서 갈꽃비를 만드신 분이다. 갈꽃비를 만들기 위해서는 갈꽃 새순이 나오기 시작하는 7월 말부터 꽃이 피기 전인 9월초까지의 갈꽃을 채취한다. (9월초 백로가 지난 후의 갈꽃은 꽃이 활짝 피기 때문에 빗자루 재료로 적합하지 않다.) 채취한 갈꽃은 잘 말려 보관해두었다가 11월 농한기 되면 빗자루를 매서 판매한다.

 

구술자는 올해 몸이 아파서 갈꽃을 전혀 채취하지 못했다고 했다. 갈꽃비를 매기 위해서는 갈꽃이 필요할텐데, 다른 곳에서 구입 했는지 여쭤보니 본인이 직접 뽑아와야지 다른 곳에서 구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예전에는 갈꽃이 나는 지역에 가면 구입 할 수 있었는데, 요즘엔 뜨거운 여름에 채취해야 하는 힘든 갈꽃채취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구입하기가 어려워 졌다는 것이다.

구술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의 부인이 녹음은 괜찮지만 본인 사진을 찍지 않는 조건으로 대화에 참여해 주었다. 부인의 이름은 문명애이고 1953년생이며 고향은 고살메다.


[ 갈대꽃 채취에 대하여 ]

구술자 1 : 갈대꽃은 팔월이 질(제일) 더울 때 따야유, 8월 달이. 8월 초에 질(제일) 더울 때 따서, 말려서, 껍데기 빼서 말려 놔유.

구술자 2 : 이냥반(남편)이 따가지구 오면 내가 집에서 말려주구

조사자 : 갈대꽃을 채취하러는 언제 가시나요?

구술자1 : 새벽일찍 나가유, 시원할 때 뽑을려구, 그리구 세시나 돼서 들 어오쥬. 힘든게 쉬었다 하구 쉬었다 허구 그렇게 서너시되서 들와유.

조사자 : 그러면 점심은 어떻게 하셨나요? 도시락을 준비해서 가셨나요?

구술자2 : 새벽에 일어나서 막~ 얼음물 얼리고 미숫가루 타구 커피 타구 다 혀서 아이스박스에다 다 넣어 주지. 그렇게 안 허믄 못허지 배고파서두.

조사자 : 갈대꽃을 제가 직접 뽑아보니 잘 안 뽑히고, 또 끊어지고 힘들 던데, 잘 뽑는 방법이 있나요?

구술자1 : 힘든게 맞는 얘기지 잡아 댕길라믄 힘들구, 빤뜻이 잘있음 좋 은디 일으켜 세울려믄 자빠져 잘못허믄

구술자2 : 저마당으로 하나 말리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뽑아왔다고 부러워혔어. 하튼 우리 집 만큼 많이 뽑아온 사람 없어.

조사자 : 말릴 때 잘 말리는 방법이 있나요?

구술자2 : 요령은 없어. 이게 손이 몇 번 가. 꽃을 따오면 이파리가 다 따 라 오잖어 그러면 하루 말려서 그걸 다 뽑아야 돼 일일이 이파 리를 빼서 다시한번 또 널어 그렇게 두 번 널어야 되. 손이 너 무 많이 가 뽑아와야지, 말려서 홑떼기 떼서 또 말려야지, 또 매야지, 그리구 갈대꽃 뽑는게 너무 힘들어 한여름 최고 뜨걸 때 갈대꽃이 나오잖아 갈대꽃 뽑으러 대니는(다니는) 사람들 보면 동냥아치는 저리 가라혀 꽤재재 혀가지구. 손이 너무 많 이 가는 거에 비해서 너무 싸~ 빗자루가

조사자 : 갈꽃비를 매려면, 갈꽃을 삶아서 말렸다고 하던데, 그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구술자2 : 옛날 으른들은 쪘대, 소금물에. 그게 질기대. 그런데, 소금물에 쩌노면 거기서 간(소금물)이 나와서 안좋대. 소금물에 쩟으니까 눅눅 혀가지구 소금기가 나온대, 질기다구는 허는데 우리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몰라. 지금은 수백 자루 수천 자루 허는디 그걸 어떻게 쪄서 혀. 못허지.

구술자들은 이동네(고살메)가 원래 빗자루 마을이니 갈꽃비 매는 체험이 활성화 되고, 또 계속 젊은 사람들에게 이어지면 좋은데 하려는 사람들이 없어서 사라지게 될 위기에 있다고 못내 아쉬워했다.

김종덕은 몸이 불편함에도 갈꽃을 채취하려고 미산(보령시 미산면) 쪽으로 답사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하지만, 혹시라도 건강에 무리가 올까봐 마음과는 달리 갈꽃 채취하러 나서지는 못했다고 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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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김종덕의 갈꽃비 제작 작업장 & 갈꽃 채취 시 메는 가방(쌀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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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쌀자루로 만든 갈꽃 채취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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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쌀자루에 가방끈을 이용, 어깨끈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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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쌀자루가 길어서 반절 접어 만든 갈꽃 채취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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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전시 판넬의 주인공 김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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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 김종덕 자택>


기록개요

기록명갈꽃 채취 & 손질과정기록방법글, 사진
마을명서천읍 삼산3리 고살메시대1970년대~현재
개요고살메 마을 가내수공업 '갈꽃비' 재료인 '갈꽃 채취'와 '손질' 이야기검색어#고살메, #갈꽃비, #갈대채취, #갈꽃채취, #부업, #가내수공업, #갈대
수집 및
생산자료
생산 자료 : 사진 6장제보자

김종덕(남성, 1931년생, 고살메 출신) : 구술자1

문명애(여성, 1953년생, 고살메 출신) : 구술자2

기록자홍성윤기록기간
관련사업서천읍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관련기관서천군 농업기술센터, 서천 중심지 지원센터,
서천군 평생학습센터, 예소아카이브,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붙임자료

마을기록 원본 - '사방팔방 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 혹은 '서천군청 자치행정과 교육지원팀' 문의


※ 이 마을기록은 평생교육팀 '마을기록활동가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사방팔방서천이야기 마을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을기록활동가들이 기록한 자료입니다.

※ 본 내용의 저작권은 1차 저작자(기록자)에게 있습니다. 본 기록의 무단 배포와 변형, 활용을 금지합니다.